미국의 도시들 중 직접 가 본 곳은 몇 곳 안 되지만, 서부의 여러 도시를 비롯해 자동차가 없으면 다니기 쉽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에 반해 뉴욕은 버스와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이 편리해 차가 없어도 다니는 데 별 불편함이 없는 도시다. 특히 지하철은 몇십 개의(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노선이 몸의 혈관처럼 뉴욕 전역에 뻗어 있다. 웬만한 곳은 다 지하철로 갈 수 있어 운전을 못하는 나 같은 뚜벅이에겐 안성맞춤의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뉴욕의 중심지인 맨해튼은 특히 교통 체증이 심해 방문자들뿐만 아니라 뉴요커들도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는 듯싶다. 언젠가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는데, 여러 노선이 지나는 역에서는 서울의 지하철 못지않게 혼잡했다.
그런데, 이 지하철이란 것이 언제부터 운행을 한 것인지, 현대적인 뉴욕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래된 계단과 개찰구가 대부분이고, 여러 노선이 다니는 역에 들어가면 여기가 두더지 굴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 쥐가 다니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하니 지저분한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하철일지도. 그런데도 그 두더지 굴이 뭔가 재미있다는 게 반전이다.
먼저 역 이름을 표기하는 글자에서부터 역마다 개성이 드러난다. 대개는 규칙과 통일성을 우선시하는 공공시설의 표기를 제각각 다르게 하는 자유로운 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플랫폼이나 복잡하게 이어진 환승로의 벽에는 역마다 테마가 있기라도 하듯 다양한 미술 작품(?)이 그려져 있다.
어느 역에서는 플랫폼 타일 벽에 그려진 모자 그림 아래 자리를 잡고 서면 멋진 모자를 쓴 것 같은 연출을 할 수 있고, 또 어느 역에서는 뉴욕의 빌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물론 벽에 그려진 그림 속 빌딩들이긴 하지만.
사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이런 그림들이 대단한 예술 작품들은 아니다. 하지만 역마다 소소한 재미와 유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작은 것에서부터 생활 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뉴욕의 문화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지하철역도 단순한 교통수단으로서의 공공장소가 아니라 문화와 접목된 공간이 된다면, 지하 굴속의 답답한 그 공간도 얼마든지 새롭게 변신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재미있는 변신은 우리나라의 대중교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많이 운행되지는 않아 아주 간혹 운 좋게 만날 수 있는 테마 지하철이 그중 하나다. 예전에 만화 캐릭터인 ‘라바’를 테마로 하여 지하철 외부와 내부를 모두 라바의 여러 캐릭터로 꾸며 놓은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지하철을 타면 연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일상 풍경과 달리, 그날 사람들은 지하철 안의 재미있는 만화 캐릭터를 보며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꼈을 거다.
또 한 가지, 서울시를 활보하는 타요 버스! ‘꼬마 버스 타요’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버스 앞부분에 눈이 달린 귀여운 타요 버스가 운행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땐 그냥 그 자체로 미소가 지어졌다. 복잡하고 짜증 나는 현실의 도로를 한순간이나마 즐거운 만화 속 풍경처럼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삭막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적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