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컷 늦잠 자야지!’
직장인들에게 퇴사 후 꼭 하고 싶은 일을 꼽아 보라고 하면 짧은 휴가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긴 여행이나, 바쁜 생활에 치어 뒷전으로 밀렸던 문화생활 등 여러 가지를 꼽겠지만, 매우 원초적인 ‘잠’ 역시 실컷 누리고 싶은 일들 중 하나가 아닐까?
갑작스런 퇴사라 ‘퇴사 후 무엇을 해야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던 나 역시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내일부터 당장 할 수 있는 건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회사를 다닐 때도 주말엔 실컷 잠을 잘 수는 있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날이면 황금 같은 아까운 주말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진한 아쉬움이 남는 그런 늦잠과는 차원이 다른, 맘 편히 원하는 만큼 잘 수 있는 ‘자유’가 드디어 생긴 거다.
이젠 아침마다 이불을 부여잡고 10분만 5분만 하며 아침잠과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니 못 봤던 드라마를 밤늦도록 정주행할 수도, 좋아하는 음악이며 책도 출근 걱정 안 하고 실컷 볼 수 있게 되었다.
‘야호! 내일부턴 지각 따위 걱정 안 하고 아침에 원하는 만큼 잘 테다! 잘렸어도 좋은 게 있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마인드 컨트롤일 수 있겠지만 출근에 대한 부담감 없이 드는 잠자리는 진심 꽤나 좋았다. 어쨌든 마음은 그랬다.
그런데 웬일.
다음날 아침 7시가 되니 눈이 반짝 떠지는 거였다.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생각해 보면 주말엔 늦잠 자기 일쑤여도 출근하는 평일엔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되면 거의 대부분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던 것 같다. 평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생활 패턴이 20년 간 지속되었으니 그 생활 습관이 몸에 익은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눈은 떠졌지만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고 맘껏 뒹굴 수 있는 권리를 최대한 누렸다. 그것만으로도 좋긴 했지만 회사 다닐 때 어쩌다 출근을 좀 늦게 해도 되는 날 아침의 꿀맛 같은 달콤한 기분이 나지 않았던 건 왜일까.
“이상해. 아침에 실컷 잘 수 있는데도, 회사 다닐 때 일어났던 시간만 되면 눈이 떠져.”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회사를 그만 둔 퇴사 선배인 친구를 만나 이야기했다.
“나도 그랬어. 그뿐인 줄 알아? 의식한 것도 아닌데 아직도 난 월요일엔 약속을 안 잡더라고. 회사 다닐 때야 월요일은 피곤해서 되도록 약속을 안 잡았지만, 이젠 주말이나 월요일이나 똑같은 하루인데.”
친구의 퇴사 후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으며 킥킥 웃어댔지만 나도 곧 순간순간 겪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습관이 무섭다더니만, 오랜 시간 직장에 묶여 살아오며 몸에 배인 ‘습관’의 힘을 이런 데서 느끼게 될 줄이야. 퇴사 후 참 많은 것이 달라질 텐데, 그동안 직장인으로 살며 알게 모르게 쌓이고 굳어져 만들어진 몸과 마음의 패턴, 습관들이 바뀌려면 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싶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생활 습관과 패턴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질 테지만.
덧.
습관만큼이나 놀라운 인간의 적응력을 확인하게 된 것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