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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당근 Oct 24. 2021

난 뭐 하는 사람이지?

평일 시간이 자유로워지니 관심은 있었지만 그동안은 바빠서 혹은 직장 때문에 시간을 맞출 수 없어 듣지 못했던 강좌들을 들을 수 있어 좋다. 회사 역량 평가의 점수를 채우기 위해 듣는 강좌가 아니라 업무와 하등 상관없는, 어디 꼭 써먹을 데는 없지만 온전히 그냥 배워 보고 싶은 마음에 참여하는 수업은 역시 재미있다.

기분 좋게 수업을 마친 어느 날이였다. 강좌를 평가하는 설문지를 나눠 주시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후다닥 질문에 답변을 체크했다. 마지막 그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귀하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질문 밑에는 친절하게도 학생, 사무직, 교육직, 서비스직 등등 여러 직업군이 나열되어 있었다.


‘앗, 뭐에 체크하지?’

‘어차피 삶은 배움의 연속이니 그냥 학생이라고 체크할까? 너무 양심 없는 건가. 학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들어 보이겠지?’


그 많은 예시에도 체크할 곳을 찾지 못해 흔들리는 나의 동공에 맨 아래쪽 직접 쓰도록 칸이 비워져 있는 ‘기타’가 들어왔다.

집에서 엄마가 농담처럼(?) 말하는 ‘백수’란 말이 순간 떠올랐지만, 혼자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은 별 생각 없이 ‘백수’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직업이 없어 돈을 벌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렇군 했는데,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이란 사전에는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라고 나오는 거다. 비록 빈둥거리고 놀고먹는 건 맞다손 치더라도 건달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 않나. 절대 열 내는 건 아닙니다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뭘 고민해. 설문지 걷는 분이 보려나? 아니 보면 어때서! 무직이라고 쓰면 간단한 일인데.’


아, 직장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신경 쓰지 않던 이 질문에 내가 이토록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타에 마땅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동안은 나를 어떻게 소개했었지? 생각해 보니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직업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장을 나오면서 그 직업이 사라지고 나니 나를 설명하기가 참 애매해진 거다. 특히 이런 설문지 질문처럼 단 한 마디로 나를 규정해야 할 때는 더더욱.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종사하는 일, 즉 직업을 빼놓고 우리 자신을 소개하는 건 어쩌면 앙꼬 없는 찐빵 같이 알맹이 없는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를 설명할 때도, 또 다른 사람을 소개받을 때도 직업을 빼놓을 수 없는 건지도, 가령 소개팅 자리에 나가기 전 다른 건 몰라도 뭐하는 사람인지는 다들 꼭 물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수를 받으며 일정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정말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길이 없는 걸까?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일, 마음속으로 바라고 꿈꾸는 일,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일 등등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나를 더 깊이 있게 알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건 다른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데도 마찬가지일 테고.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나는 씁니다.
- 롤랑 바르트


언젠가 책에서 보았는데, 직업을 물으면 으레 나오는 답변이 아니라 마음에 오래오래 남았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긴다면 “저는 글을 써요.”라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비록 나는 롤랑 바르트 같은 작가는커녕 아직 내 책을 출간해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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