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다. 워낙 이슈가 되다 보니 아이돌 스타를 뽑는 오디션에서부터 힙합, 뮤지컬, 밴드 오디션에 올해는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트로트가 나올 정도로 국민적인 열풍을 몰고 왔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종류도 다양해졌다.
나도 작년엔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 푹 빠져 돈까지 써가며 문자 투표까지 하는 열혈 시청자였다. 내가 그렇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건 숨어 있던 보물 같은 실력자를 발견하는 기쁨이 쏠쏠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다음 무대로 올라가고 누군가는 도전을 멈춰야 하는 서바이벌 진행 방식의 흥미진진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열정과 노력,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하는 도전자들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승자에게뿐만 아니라 패자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경쟁을 한 도전자들도 경연을 마친 후 서로를 부둥켜안고 진심으로 축하와 격려를 해 줄 수 있는 걸 테다.
회사에서는 이런 식의 공개 오디션은 아니지만, 일종의 승진 서바이벌 오디션(?)이 펼쳐진다. 승진을 하기 위해선 시험과 면접 등을 치루며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 이겨야만 올라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회사에서의 서바이벌 오디션은 당연하게도(?) 흥미진진한 재미나 훈훈한 감동 따윈 없다.
회사마다 승진 절차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의 전 직장에서는 연차가 되어 승진 후보자가 되면 먼저 수십 시간의 교육 이수를 해야 했다. 그런 다음 필기시험과 후보자들 간 조별 과제, 임원진 승진 면접, 그리고 몇 년에 걸쳐 받은 고과 점수가 종합적으로 합산되어 승진의 당락이 결정되었다. 일을 잘하나 못하나 큰 결격 사유 없이 연차가 되면 승진을 시켜 주던 예전과 달리 꾀나 정교한 절차와 시스템으로 승진이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승진 후보자가 꼭 이수해야 하는 교육은 각자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라기 보단 인사 관련 부서에서 정한 프로그램을 정해진 기간 내에 들어야 하는 것으로, 승진 후보자들 사이에선 업무 외에 해야 하는 과중 업무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니터 화면 한쪽 구석엔 온라인 교육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고, 다른 업무에 한창인 팀원들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사실 나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필기시험 역시 자신이 하는 업무 외에도 회사의 여러 사업과 다른 부서의 업무를 이해함으로써 각자의 업무 능력을 넓힐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또한 벼락치기 암기로 시험을 치루고 나면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리는 듯했다.
승진 후보자들을 조별로 나누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나 기존의 사업에서 개선되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과제를 주고 제안서를 만들어 발표하게 하는 평가도 잘 들여다보면 구멍이 많았다. 가볍게 업무와 병행하며 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님에도 주어진 업무를 그대로 하면서 진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큰 부담이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업무든 조별 과제든 어느 한쪽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원 내 누군가는 과제에 열심히 참여하는 반면 누군가는 이름만 올리며 무임승차하는 이도 더러 있었을 테지만 승진 심사자들이 이를 다 파악하고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조별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 얌체 같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더 깊이 살펴보면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후보자들이 많아도 애당초 승진자의 비율은 정해져 있어 그간의 고과 점수가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진다거나 하면 승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조별 과제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픈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과 역시 부문과 팀의 성과에 크게 좌우되기에 개인의 능력과 성과만으로 다 잘 받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평가 기간 내 육아 휴직이라도 한 경우라면 평균점의 고과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고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누군가는 승진 레이스에 전력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으리라. 실제 승진 후보자였던 한 팀원은 그럼에도 후보자가 된 이상 그 모든 교육과 시험, 과제, 면접을 치러야 하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했었다.
결국 교육, 필기시험, 팀별 과제 등의 과중한 절차가 승진자를 가르는 데 큰 변별성이 없었기에 승진 시스템 및 결과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던 건 아니었을까.
각자가 지닌 능력과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절차와 시스템이 갖추어진다면 시작도 전에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은 도전자들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는지. 그래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경쟁을 할 수 있다면 결과를 떠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회사에서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승진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어렵게 승진 레이스를 함께 펼친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하고, 또 서로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만드는 오디션 같은 승진 평가를 할 순 없는 건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 그런 뜬구름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