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재발 불안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불안과 걱정들이 무의식에서부터 올라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해결책도 역시 복합적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에 결코 쉬운 답은 없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울 때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하죠. 암환자의 재발 불안을 해소하고 다시 건강한 일상을 찾게 하기 위해서도 한 마을이 필요합니다. 그 마을에는 환자 본인, 환자의 가족, 환자의 친구,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간호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각 분야의 재활치료사, 병원의 잘 갖추어진 돌봄 시스템, 그리고 환우회나 지역사회 치료 프로그램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함께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환자를 도울 때(환자 본인 스스로를 돕는 것 포함) 우리는 환자의 재발 불안을 낮출 수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각 팀원들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볼 텐데요.
먼저 의료진의 역할부터 얘기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재발 불안을 돕기 위해서는 환자의 불안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지금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불안의 기원은 뿌리가 깊으므로 그 가장 깊숙한 뿌리에 어떤 걱정이 있는지 아는 것은 환자를 돕기 위해 필요한 기본 정보입니다.
자 그렇다면 환자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환자에게 질문을 잘 던져야 합니다. 즉 환자와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바쁜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환자와 대화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미국처럼 환자의 삶의 질에 대한 대화, 치료의 목적에 대한 대화를 할 때 그에 맞는 수가를 측정해서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더라도 환자와 대화하는 시간에 대해서도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시스템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는 데는 생각보다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몇 가지 적절한 질문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는 것이 그를 파악하는데 효과적인지는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자가 느끼는 재발 불안에 대한 대화를 하는데 거부감이 든다면, 그런 본인의 마음의 정체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환자와 대화하는 게 불편한 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환자가 너무 길게 대답해서 진료 시간을 다 소모할까 봐서? 대화를 하면 진료가 자꾸 밀려서 오늘 일정을 제때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몰라서? 환자의 대답에 어떻게 적절히 반응할지 몰라서? 환자의 불안이 내게 옮겨와서 나도 덩달아 조급하고 불안해져서? 환자의 재발에 대한 불안이 사실은 나에게도 있고 나도 환자가 많이 걱정이 되어서? 환자와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재발 불안을 낮추는데 의사와 같은 1차 치료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자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거부감이 드는 내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내 불안을 먼저 다스리는 일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로 환자의 암 재발에 대한 걱정은 내가 더 잘 치료해주지 못해서 재발한 것은 아닌지,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다른 의사에게 치료받았더라면 재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지, 재발한 후에 더 해줄 수 있는 치료법이 없으면 어떡할지 하는 여러 가지 불안감과 무기력감을 의사에게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료의 목적이 치료에만 집중되어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입니다. 또한 의사로서 교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이 성취와 치료의 성공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의 목적은 치료를 넘어서 돌봄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의사의 역할도 병의 제거뿐 아니라 환자의 삶의 질의 향상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환자의 재발은 의사에게 무기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처럼 미국에서 중독 환자를 매일 보는 의사는 이 무기력감을 스스로 돌보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환자의 중독이 재발한 것이 내가 무언가를 덜 해주어서, 내가 무언가를 못해주어서가 아니라, 재발과 회복을 반복하는 것이 중독이라는 병의 특징이라는 것, 그래서 전문가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질환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무기력감이나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것이 가능해야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치료하고 돌볼 수 있습니다.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이니까 재발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덜 해줘서 못해줘서 재발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의사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이나 무기력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