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환자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 진단, 치료, 경과, 예후, 향후 계획에 대해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알려주어야 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한번 들은 말을 모두 잘 기억하는 환자는 없습니다. 신체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계획한 경우 본인다운 모습일 때 미리 수술 후 후유증이나 변화되는 삶에 대해 교육을 하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료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야 환자의 불안감도 낮아지므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대처방안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수술이나 암 치료 방향을 환자가 직접적으로 결정할 수 없더라도 교육과 정보제공을 통해 환자가 자신의 신체, 그리고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최대한 도와주어야 합니다. 결국 병원과 환자의 관계, 의료진과 환자의 관계, 연결의 질이 재발 불안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앞서 암 재발 환자에서의 분리불안을 언급했는데요. 의사와 자주 만나지 못하면 그새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심리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너무 자주 병원을 재방문하거나 약을 과다하게 사용하거나 불필요한 병원의 자원을 소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리불안을 낮추기 위해서는 팔로우업 기간을 서서히 조금씩 늘려가는 방법이 있고, 환자와의 메시지 시스템, 전화 연결 시스템을 통해서 환자가 언제든지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을 수 있고 상의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메시지 창구를 열어놓으면 너무 자주 연락을 할까 미리 걱정하는 의료진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실제로 불안할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독려하고, 그 불안을 해결해 주기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환자의 불안도가 낮아져서 불필요한 연락도 덜하게 됩니다. 메시지 시스템을 만들 때는 가급적 일관된 인력이 환자의 응대를 맞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환자와 오랜 관계를 맺은 의료진일수록 환자가 신뢰할 수 있고 이런 신뢰감이 불안감을 낮추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환자들에서 의사보다는 간호사나 사회복지사 심리치료사들을 더 편하게 느낍니다. 의사가 바빠 보여서 또는 권위 때문에 거리감이 들어서 솔직하게 자신의 걱정과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의사가 아닌 의료 인력이 환자와 직접 응대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도 의사이고 제법 부드럽게 환자들을 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저한테는 약을 먹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사회복지사에게는 약을 잘 먹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제가 무서워서라고 변명을 합니다. 제가 비주얼로 보나 목소리로 보나 무서운 사람은 아닌데요. 어쨌든 이런 비주얼로도 환자들은 의사를 어렵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의사가 아닌 의료 인력이 환자와 장기적이고 일관된 관계를 맺는 것이 환자의 재발 불안을 줄이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환자의 걱정과 불안을 다 해결해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안을 이해받는 경험'입니다. 실제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이해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의 마음은 나아집니다. 이것이 환자와의 진실된 연결이 가지는 힘입니다. 이해받았다는 느낌은 그와 내가 연결되었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환자의 마음과 연결이 된 후에는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해 줄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는 그런 단호하고 일관된 태도로 대하기만 해도 됩니다. 해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그들의 불편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진심으로 이해해주기만 해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집니다. 환자와의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당연히 적절한 바운더리 boundary, 리밋 세팅 limit setting이 필요합니다. 의사라고 해서 병원이라고 해서 환자의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관된 병원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반복된 패턴과 익숙한 환경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어느 순간 환자들에게는 병원이 집만큼 익숙한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병원이 환자에게 편안하고 친숙한 치료적 환경을 적절히 제공해 주는 일은 중요합니다. 내 암은 예측할 수 없지만 내가 치료받는 환경, 병원의 시스템이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곳이 되면 환자가 자기 조절감을 되찾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동일한 의료진이 일관된 케어를 제공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병원이 모든 일을 다 도맡을 순 없습니다. 특히 퇴원 후의 삶에서는 지역사회, 즉 커뮤니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미국은 비영리 커뮤니티 단체가 많아서 온오프라인으로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환우회 그룹 정도가 있고, 좀 더 체계화된 커뮤니티 센터는 아직 자원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환우회를 통해서 비슷한 연령과 상황에서 같은 암을 앓는 이들을 만나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병을 좀 더 잘 이해받을 수 있으므로 친구나 가족이 대신해줄 수 없는 역할을 맡아서 해줄 수 있습니다. 암 관해와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면 지역사회 모임에서 또 다른 환자들을 도울 기회가 주어지고, 이것은 아 내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기 가치감을 높이고 자존감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암 재발 두려움을 가진 환자와의 대화에 대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다 했고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재발 불안에 대한 좀 더 깊은 치료적인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앞서 재발 불안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공황 장애,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등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발 불안이라는 표면적인 불안은 동일해 보여도 조금 더 구체적인 진단적 평가를 시도하면 각기 다른 뿌리를 가진 질환들의 특징을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재발 불안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고 그 얼굴의 형태에 따라 다른 접근 방식이나 치료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특징을 보이는 재발 불안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약물, 심리 치료를 병행하는 편이 낫고, 범불안장애의 양상을 보이는 재발 불안은 범불안 장애의 치료에 일차적으로 쓰이는 약물이나 심리 치료를 고려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환자의 불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선행된다면 시행착오를 줄이는 치료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