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 Nov 24. 2020

선생님이 심어준 작은 씨앗 하나

WEST프로그램 참가 후기

<선생님이 심어준 작은 씨앗 하나>

1. 과거 회상 

“주영아, 니는 나중에 커서 꼭 배낭 메고 세계 일주 한 번 해봐야된데이.”

가을의 짙은 노을이 고등학교 교실에 드리우던 어느 날, 저의 담임 선생님은 평생을 시골에서만 자라 온 저에게 얼토당토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학교 가면 1달러짜리 바게뜨 빵 가방에 하나 넣고, 배도 좀 주려가면서라도 세계 여행해봐야 된데이, 알긋나?”

 “아... 제가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세상을 볼 수 있는 통로라곤 책이 거의 전부였던 저는 책 속의 모습들을 마음 속에 그리곤 하였습니다. 당시에 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씀은 작은 시골 마을조차 벗어나본 적 없는 저에게는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선생님은 제게 씨앗 몇 알을 마음 속에 뿌리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는 대학을 들어갔고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더 성장해갔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봉사 활동이며 학회 활동,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시골에서 온 자격지심 때문인지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고자 공부에도 더욱 매진하며 치열한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4학년이 되었습니다. 어쩐지 그동안 해왔던 고생보다는 아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건데......”

치열했던 그 간의 기억들보다는 무언가를 채우지 못한 갈급함이 마음 속에 남아있었습니다. 홀로 교정을 걸으며, 저의 길지 않았던 삶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때 불연 듯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계를 경험하라’던 선생님의 말씀이 대학 생활 중 최종적으로 이뤄야 할 마지막 과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WEST프로그램을 찾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2. 미국 도착 첫날

 2019년 12월 26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몹시 춥던 2019년의 겨울은 앞으로 제가 겪을 어려움을 미리 암시하는 해주는 듯 했습니다. 오전 5시. 칠흑 같이 어두운 새벽녘, 워싱턴 DC의 한 복판에 홀로 서서 있게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과 손 마디까지 시려오는 추위를 피하고자, 저 멀리서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카페에 처음 들어가서 저는 ‘카라멜 마키아또’를 주문하고자 했습니다.    

 “아이 원투 해브 카라멜 마끼아... 토 ......”

그러나 종업원은 제가 무엇을 주문하려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연거푸 카라멜 마끼아토를 말했고, 주문을 거듭할수록 제 말소리는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제 손에 받아든 것은 달콤한 카라멜 마끼아토가 아닌 씁쓸한 아메리카노 였습니다.

 ‘이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좋을려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환경은 첫 날부터 제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를 한 잔 다 마시고, 당차게 일어나 종업원에게 곧장 달려갔습니다. 이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좀 더 당당하게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아이 원투 해브 카라멜 마키아또!”

그때 제게 필요한 건 찻 잔 속의 커피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3. 미국 현지에 도착한 지 2주 후 

 WEST프로그램의 본격적인 시작인 어학 연수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미국 도착 첫 날의 창피함을 교훈 삼아, 매일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골에서 소 여물을 주고자 일찍 일어나야 했던 생활 습관 덕분에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셨던 Tom과 Irene선생님께서는 이런 저를 보시고는 늘 항상 제 발음 교정을 해주셨고, 더불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You are a wonderful student, Jun!"

선생님들의 칭찬 덕분인지, 단 하루도 어학원을 빠지지 않고 출석했습니다. 

 물론 어학원을 다니면서 워싱턴 DC안에 있는 여러 박물관과 조지 타운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워싱턴의 가장 큰 장점은 거의 대부분의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이었기에, 교통비만 있으면 세계의 명화(名畵)와 책에서만 보았던 작품들을 온 종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백남준 작가의 텔레비전 작품이 박물관의 한 부분을 자신감 있게 차지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백남준 작가가 활동한 시기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했다고 알고 있는 데 그런 것을 극복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과는 다르게 거리에서 마주친 여러 인종들의 모습들 자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넓은 세상을 모른 채, 제가 지극히 한 인종(한국인)만 있었던 특수한 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길거리에는 한국 마트도 있었지만, 태국, 멕시코, 수단 등 정말 다양한 나라의 마트들도 군데군데 숨어있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일본 친구와 콜롬비아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은연 중에 그들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서로의 모습이 다르더라도 함께 어울리며 살 수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조금씩 와 닿았습니다.


4. 인턴십을 준비하며

 “옆 반에서 인턴십 면접 하자고 연락 왔데!”

 어학 연수를 하랴, 여행을 하랴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인턴십이야말로 참가자들 모두가 준비하고 고대하는 일이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면접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도 AREAA(Asian Real Estate Association of America)라는 샌 디에고에 위치한 비영리단체와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설명을 보태자면, AREAA는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및 태평양 섬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의 주거 안정을 돕기 위한 단체였습니다. 경제학과를 전공한 저에게는 미국 주택 시장에 대해 알아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면접을 보기 전,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여러 활동들과 소식지,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홍보 영상들을 모두 확인하며 면접을 준비하였습니다. 비록 떨렸지만, 그동안에 연습한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어쩐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면접은 화상 면접으로 약 20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면접 질문들은 주로 기존에 제가 제출한 포트폴리오와 이력서에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회사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회사 홍보지를 꼼꼼히 읽어야만 알 수 있었던 것들을 말했습니다.

 “저는 발간한 홍보지를 읽으며, 여성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AREAA의 관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인터뷰 담당자들은 저의 적극성과 성실함을 보셨는지 1주일 후 합격 통지를 알려주셨습니다.    


5. AREAA 에서의 인턴 생활

  영화 ‘코코’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샌 디에고로 이동했습니다. 집은 게이 부부인 Robert와 David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였습니다. 그 둘은 제가 만난 사람들 중 손에 꼽을 만치 좋으신 분들이셨습니다.

 한편, AREAA에서 제가 맡은 업무는 AREAA에 소속된 미 전역 40여개의 지점의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고 목요일마다 변경된 맴버십 리스트들을 각 지점의 임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업무는 처음에는 단순 반복 업무였으나 모든 일을 마치려면 하루를 고스란히 써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반복적인 일들이다 보니, 자칫 업무에 실증을 낼 수도 있었으나 저는 이를 보다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틈틈이 익힌 VBA를 활용하여 업무 상당 부분을 자동화했고, 포토샵도 익혀 이미지를 편집하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AREAA 홍보지 제작과 데이터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이를 사수들인, Jessica와 Vanessa에게 이를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한 업무 뿐 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음을 보여드리고 나니 이후 제가 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Jun, 이제는 나한테 일일이 허락받지 않고, 너가 직접 업무를 해봐도 될 것 같아." 

 1달 정도가 지나고 나니, 저의 사수 분들은 이번에는 보다 독립적으로 업무를 처리해보기를 권유했습니다. 

 ‘엥... 나 혼자서 잘 할 수 있을까?’ 

 사수의 도움 없이 직접 미국 현지인들과 소통하면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도전이었습니다. 

 영어로 작문을 하는 것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에도 수십 통 씩, 영문 이메일로 회답하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주후에는 영문 작문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습니다. 임원들의 요청을 확인하고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며, 때때로 받는 감사 이메일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업무에 임했습니다. Jessica는 제가 업무를 굉장히 빨리 습득한다며 칭찬했습니다. 


6. 샌 디에고서의 여행

 사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밖을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중에는 인턴 생활을 열심히 했고, 주말에는 시간을 내어 사람들을 피해 걸어서 샌 디에고를 구경하기로 하였습니다.

 샌 디에고의 가장 큰 장점은 날씨였는데, 정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게을러지기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어학 연수를 위해 머무른 워싱턴DC는 저녁이면 너무 추워서 밖에서 잠을 자는 홈리스(Homeless)들이 안타까웠지만, 샌 디에고는 날씨가 좋아서 필요하면 나도 밖에서 얼마든지 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낭 하나를 메고서 발보아 파크와 해변을 차례대로 방문했습니다. 이국적인 식물들과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드 넓은 해변가의 모습은 하루 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샌 디에고도 와보고...... 진짜 성공했네.” 

비록 무일푼에 가까운 배낭 여행이었지만, 이렇게 먼 나라에 와서 홀로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는 해안가였고, 동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사막지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WEST친구와 함께 사막 지대의 산에 올라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그늘 하나 없는 고된 하이킹이었지만 우리 둘은 산 정상에서 바라보던 풍경에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름다운 경치만 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는 집을 잃고 돌아다니는 홈리스들이 너무나 많았고, 먹을 음식이 없어 매 주 푸드뱅크(Food Bank) 앞에는 긴 줄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저 같은 이방인에게야 샌 디에고가 아름다운 휴양지겠지만, 이곳이 터전인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고달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그 날 제가 본 수 많은 홈리스들에 대해서 함께 사는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얘기했습니다.

 “Jun, 그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사실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이야.”

Robert는 거리의 홈리스들은 몇 몇은 정신 문제가 있어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상당 수는 비싼 월세 때문에 혹은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집을 잃고 밖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열심히 살았음에도, 사회적 안전망이 그렇게 조밀하지는 못하여 길거리에서 살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나라인 만큼, 그들의 삶의 결과 역시 그들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그러한 사회제도에 한 몫 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쩐지 제게는 그것이 조금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 날 저녁은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 시간이 되었습니다. 


7. WEST프로그램을 마치며

 2020년 7월 26일.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일하던 4개월의 인턴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인턴 십을 마치는 날, 우리 팀원들은 ‘어려운 시기에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일만 했다’며 제게 과분할 만큼의 선물과 편지를 주었습니다. 사실 8개월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별 달리 유명한 곳들을 자주 가진 못했습니다. 주머니 사정도 여유 있지 못했고, 때마침 터진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관광 명소를 가지 않아도 미국의 골목 길 하나하나가 제게는 특별한 여행이었습니다. 동네 마트 어귀에서나 한적한 공원의 공터 위에서는 어김없이 현지인들의 삶과 생각을 엿 볼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세계를 경험해보라’는 얼토당토않던 선생님의 말씀은 불가능했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다양성의 가치와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 이국적인 자연과 그 뒤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이면도 이번 기회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혀 주었고, 꿈의 크기 역시 한 층 더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 있어왔던 갈급함은 이미 채워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8년 전, 선생님께서 제게 왜 ‘세계를 경험하라’는 과제를 주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