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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03. 2020

시골 소년이 얼떨결에 미국에서 인턴까지 한 이야기

시골아이, 영어 공부, 미국인턴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밭이나 논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당시 아궁이에 불을 지필 나무를 가지러 가러 아버지랑 여러 곳을 노다녔다. 내게는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간다거나 휴가를 보낸 기억은 사실 거의 없지만, 일을 함께 하며 땀을 흘리고, 이른 아침 라면을 먹고 일을 시작한 기억들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부모님과의 추억은 내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업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일 무렵, 비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교육이 앞으로 내게 얼마나 중요하고, 부모님의 못 다한 교육에 대한 한을 짐처럼 여기며 더욱 열심히 하려고 했다. 치열하게 보냈던 3년 후, 만족할 만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것은 내 삶의 여정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처음 대학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주위에는 온 통 부잣집 아이들로 보였고,  아리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해서 그래서인지 성적도 만족할만하지 못했다. 특히나 내가 가장 열등감을 여겼던 것은 영어였다.



당시 학교 인권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당시 담당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영어만 잘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영어 공부해서 유창한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때도 그건 어릴 적부터 해외 경험이 있거나, 언어 감각이 가능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해요."

" 참가자 분, 그러면 이제부터 영어로 자기 소개 한 번 해보세요."

우물쭈물 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에 쓰인 말이다. 당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가까스로 오른 최종 면접에서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야했었다. 사실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기에 너무 당황했고 10분 안 밖으로 예정되었던 면접도 2분이 되어서 나왔다.


내 머릿 속에는 내가 만약 영어만 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역량이 비슷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영어 의사 소통 능력으로 진가를 발휘하고 인정받는 모습들을 보며 한편으론 억울하고, 다른 한편으론 부러웠다.


어쩐지 시골에서 자란 내가 다른 사람과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당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가끔 친구들이 SNS로 영어로 다른 외국인 친구와 연락을 하는 모습이었다. 과연 내가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모든 것에 한계를 느끼고 대학 생활을 후회하고 있던 무렵, 문득 영어라도 확실하게 잘 해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마음 고생이 심해서 여러 책과 조언을 찾아다녔는 데, 누군가 불혹이 되어서 돌이켜 보았을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게 가장 후회된다고 했었다. 당시 마음 상태에서는,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영어라도 공부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어 공부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과 현실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였다.


 객관적으로 나는 몇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금전적으로 난 일단 학원에 갈 순 없었다.

둘째로는 아르바이트와 여전히 학과 수업으로 생각보다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셋째로는 나는 쑥쓰러움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외국인 친구를 선뜻 사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1. 그때 시작한 것은 일단 무작정 영어 콘텐츠들을 틈틈이 듣기로 했다.

정말 귀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이어폰을 끼고 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자막을 틀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기도 하고, 이해를 못했음에도 스스로를 속여가며 난 이 영상을 이해했다고 속이기도 했다.


2. 카페에 가서 외국인이 있으면 간혹 옆자리에 앉아 듣기 연습을 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데, 영어 뉴스나 콘텐츠는 일종의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 영어가 대체로 간결하고,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듣기이다. 그러나 실제 원어민이 쓰는 표현과 속도, 억양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마시지 않는 커피를 두고서 이해못하는 이야기를 몇 십분씩이나 듣기만 했던 것 같다.


3. 운 좋게 영어 과외를 지도하면서 문법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로 한 중학교 1학년을 학생을 가르쳤는데, 과외를 하면서 틈틈이 익힌 문법이 잊혀둔 영어 문법 지식을 되짚어 보는 데 굉장히 좋았다. 고3까지만 해도 쉽다고 생각한 문법을 이제와서 보니 내가 잊고 있고, 잘 못 알고 있던 부분이 상당했다.


 4.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도 직접 말해보는 것이었다.

본디 외국인을 만날 용기도 없고 쑥스러움도 많아, 결국 모아둔 알바비에서 전화 영어를 끊어서 했다. 추운 새벽 녘(4~5시 정도였다.)부터 일어나서 근처 카페가 있는 편의점에 가서 홀로 연습을 했다.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일반 카페에 비해서 편의점은 일단 아침을 때울 수도 있었고, 가격도 더 저렴해서 나한테는 정말 영어 공부하기 좋은 장소였다.


그렇게 한 3개월을 할 무렵, 사실은 그렇게 크게 달라졌다거나 하는 느낌은 못 받았다. 그러나 가끔 영어 뉴스나 단순한 한 마디 말 정도는 주고 받을 수 있을 때, 조금은 늘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영어 정복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언도 듣고, 6개월만에 영어를 원어민처럼 쓰는 전설도 내 이야기인양 듣기도 했는데, 여전히 내 실력은 만족할만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3개월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고, 또한 지금 돌이켜보면, 영어 글쓰기에 너무 소홀했던 것도 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 지원 프로그램으로 해외에 보내준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는데, 인턴에 앞 서 2개월 간의 어학원 생활도 지원해주었다. 내게는 인턴보다 2개월 간 집중적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꼭 한번은 어학 연수라는 것을 받아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의 집안 형편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는데, 만약 내가 합격한다면 지원금을 제외한 금액은 어쩌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요구하는 영어  성적을 맞출 수 있었고 서류와 화상 면접은 합격하여 최종 면접만 통과하면 참가할 수 있었다.


 "혹시 다시 이거 바꿀 수는 없는 건가요?"

그러나 막상 지원서를 다시 확인하고 나서, 내가 지원 자격을 학생 신분이 아닌 졸업생 신분으로 착각하여 지원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른 지원금이 엄청 달랐기에 다시 한번 바꿀 수 없냐고 수차례 관계 정부 측에 연락을 했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나의 꼼꼼하지 못함을 너무나 많이 자책했다. 당시 취업과 로스쿨도 생각을 하다가 모두 잘 안 되었기에 이 프로그램에 몰두했다.


 결국 선택을 해야했었다. 그러나 이미 취업이나 다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준비를 하기로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서 부모님과 누나들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다들 내가 사실 미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미국에 친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를 혼자서 무슨 수로 마련하겠는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일단 일주일에 아르바이트 3개를 시작했다. (엄연히 학기 중이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하던 과외는 영어 과외 2가지와 학교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무리하게 하여서 주말을 빼고는 일주일에 하루도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돈을 아낄 수 있으니 나쁘진 않았다.


형! 형은 정말 잘하실 거예요!

당시 나보다 3살이나 어리지만 나보다 정신적인 연령은 월등히 높았던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었다. 룸메는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먼저 다녀왔었는데, 나에게 늘 잘 할 것이라고 힘을 북 돋아주었다. 사실 최종 면접 당일 날 면접장에 갈 생각이 없었다. 분명 영어로 질문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영어로 이야기할 때마다 너무나 초조하여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또 설령 합격해도, 예산을 벗어난 금액을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차라리 떨어져 버리는 게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정말 그것 때문에 면접장에 갔었다. 면접장에 들어설 때도,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지 내가 합격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면접 질문이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고민 거리들을 물어봐 주셨다. 내가 평소 겪은 어려움이나 꿈,  이 프로그램을 위해서 하고 있던 노력들(영어 공부, 재정 마련 등)이라 솔직한 내 심정과 상황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 면접을 하는 내내, 나에 관한 질문들을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면접장을 나와서, 한 가지 내가 붙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붙게 되었고, 우려했던 지원금 문제는 다행히 내 경우는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 분위 탓에 어떤 경우든지 괜찮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알바비에서 부족한 부분은 대출을 하고서 갈려고 했는데, 부모님과 누나가 선뜻 거금을 내게 지원해주셨다.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시간을 헛 되어 보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에서는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도착한 미국에서는 난생 처음 경험한 인종 차별에서 부터, 의사 소통이 안되어 한참을 헤매던 기억, 한참 후에 벌어진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 등 예측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프로그램이 2개월 어학 연수 후 4개월 인턴을 하는 거였는데, 나 같은 경우는 인턴보다는 어학 연수에 부푼 기대를 가졌다.


매일 수업 시간에 남들보다 일찍와서 준비했고 최대한 선생님들께 질문을 하려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며, 근처 도서관이나 밋업에서 하는 영어 회화 수업에 따로 참가하기도 했고, 그렇게해서 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도 있었다. 평소 교회도 다녔기에, 한인 교회를 가려다가 무슨 말인지 몰라도 꾸역 꾸역 현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어학원에서 성실히 생활하고 공부했다.

물론 내가 기대한 것 보다 실망스러웠던 부분도 분명 있었다.(영어 공부는 한국에서 하든 미국 어학원에서 하든 본인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큰 깨달음이었다.) 감사하게도, 어학원 이후 좋은 회사에 매칭이 되었고, 매일을 배우는 자세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인턴 회사와 영어로 면접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한번에 인턴 회사에 붙을 수 있었다. (보통 3번까지 기회를 주는 데, 2번째에 많이 합격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무사히 인턴 생활을 시작할 것 같던 여정도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누구나 예측할 수 없던 일로 모든 게 불투명해졌다. 정말 많은 우여곡절과 마음 고생 끝에 무사히 인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많은 친구들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요즘은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가끔식 내가 어떤 길과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떠올리며 매순간을 감사하며 살고자 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시골 소년이 영어를 정복했다거나, 미국에서 멋지게 성공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찌보면 궁지에 몰려 영어라도 잘하고 싶어, 어쩌다가 미국까지 온 거라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분명 그 과정 속에서 숱하게 경험하고 실험했던 영어 공부와 미국 준비까지 내게 결과보다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만일 내가 쉽게 미국에 오고 일을 시작했다면, 지금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일에 임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영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나 같은 시골 아이는 영어를 못할 거라는 내 마음 속에 있던 확고한 생각도 이제는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또 다른 불가능 한일들을 꿈꾸며 매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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