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초로 돌아간다는 것

내가 Zone 2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

by 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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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대구마라톤 DNF 이후, 나는 달리기 훈련 방법을 거의 모두 바꾸었다. 지금까지 참가했던 마라톤 대회 기록과 경험을 잠시 내려놓고,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는 러너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 중심에는 Zone 2 달리기 훈련이 있었다.


마라톤 풀코스를 두 번이나 완주한 사람이 다시 Zone 2 달리기를 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다. KBO의 레전드 이승엽 선수는 현역 시절 매 경기 전, 타격 훈련의 기초 중 기초라 할 수 있는 티배팅을 300개씩 하고 나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선수도 매일 기초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다. 특히 나는 심박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러너였다. 페이스는 어느 정도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심박수가 무너지면 몸도 무너지고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그래서 나에게 Zone 2 달리기보다 더 필요한 훈련은 없었다.


속는 셈 치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시 나를 믿어 보기 위해 묵묵히 훈련을 시작했다.


마라톤은 정해진 거리를 보다 빨리 달리는 경기다. 그래서 페이스는 매우 중요한 지표다. 모든 러너들의 꿈이라 불리는 서브 3를 달성하려면 평균 4분 15초 페이스로 42.195km를 달려야 한다. 결국 페이스가 빠를수록 기록은 좋아진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페이스보다 심박수를 선택했다.


JTBC 서울마라톤과 진주마라톤에서 나는 풀코스 후반부에 무너졌다. 다리가 먼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심박수가 무너졌고, 그 뒤를 따라 멘탈이 무너졌다. 억지로, 정말 억지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그 완주는 기쁨보다 악몽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대회에 접수했고,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출전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 마라톤이라는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뀌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그 변질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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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 2 달리기 훈련은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인다. 천천히 달리면 되는 훈련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심박수를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조금만 방심해도 심박수는 금방 올라갔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거나, 몸이 가볍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심박수는 어김없이 반응했다. 나는 온 신경을 달리기의 모든 동작에 쏟아야 했으며 호흡, 보폭, 팔 흔들림, 착지, 몸의 긴장감까지 하나씩 살펴야 했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굳이 왜 하나 싶었고 이렇게 느리게 달리는 것이 정말 훈련이 될까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조금씩 달라졌다. 심박수가 올라가는 순간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페이스를 낮추는 타이밍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이제는 10km 이내의 거리에서는 어느 정도 심박수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정말 이 훈련이 효과가 있을까.
대회에서도 통할까.


먼저 10km 코스인 경주벚꽃마라톤에 참가했다. 페이스를 거의 보지 않고 천천히 달렸지만 한 시간 안에 완주했다. 기록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몸의 여유였다. 이후 영남일보 국제 하프마라톤에 참가했다. 대구마라톤 코스에서 직선 구간만 제외한 듯한, 업힐이 많은 대회였다. 예전 같았으면 경사 높은 구간에서 페이스가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업힐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도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남일보 국제 하프마라톤을 통해 하프까지는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조금만 더 훈련하면 하프 마라톤 2시간의 벽도 넘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과연 풀코스에서도 Zone 2 달리기 훈련이 통할까.


그래서 전국의병마라톤 풀코스를 신청했다. 대회를 앞둔 한 달 동안 Zone 2 달리기 훈련을 중심으로 훈련했다. 두 번의 거리주도 진행하며 풀코스를 준비했다.



대회 당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마라톤을 뛰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 5시,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늘 하던 루틴을 실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지 말까.’


비가 오더라도 반드시 참가하여 Zone 2 달리기 훈련의 성과를 내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의령 종합운동장 인근에 주차한 뒤 차 안에서 준비를 마쳤다. 출발 30분 전쯤 대회장으로 이동했고, 서둘러 웜업을 했다. 오전 9시,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주의한 것은 초반 오버페이스였다.


9km 지점까지는 비교적 평지처럼 느껴졌다. 몸이 가볍게 앞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몸을 붙잡았다. 풀코스 반환점까지는 참고 기다리며 페이스는 6분 30초 안팎으로 유지했다. 준비한 보급도 계획된 지점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28km 지점에서 첫 번째 사점이 찾아왔다. 왼쪽 허벅지 근육이 갑자기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몰라 20km 지점에서 액상 마그네슘까지 먹은터라,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위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한 문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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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점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다.


나는 페이스를 조금 낮췄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몸이 다시 풀릴 시간을 주었다. 다행히 뭉친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풀코스는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36km 지점에서 두 번째 사점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페이스를 줄여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어 파스를 뿌리며 근육을 풀어 보려 했지만, 허벅지는 계속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옆에서는 걷는 러너들이 보니 나도 걷고 싶었다.


특히 마라톤 풀코스에서 35km를 넘긴 지점은 수많은 러너가 걷거나 포기를 고민하는 구간이다.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한 번 걸으면 다시 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걷지 않았다.


페이스를 7분 30초까지 낮추더라도 계속 달렸다. 나에게는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했던 완주 시간은 4시간 15분이었지만 두 번의 사점이 찾아오면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풀코스 도전 끝에 처음으로 5시간 안에 완주했다. 대부분의 마라톤 풀코스 컷오프가 5시간이다. 그래서 언젠가 꼭 5시간 안에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 선을 넘기 전에 결승선에 도착했다.


물론 대단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이미 반환점을 돌아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러너들을 보며 잠시 동경의 눈빛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기록은 내게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이 기록은 약 3개월 동안의 Zone 2 달리기 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었던 후반 붕괴 현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35km까지 무너지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했으며 이전 대회에서 경험했던 페이스가 떨어졌지만 후반부 붕괴가 이번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라진 달리기였다.


물론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은 많다. 허벅지 근육이 굳어지는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더 긴 시간 동안 심박수를 통제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10km 정도의 Zone 2 달리기 훈련을 해 왔다면, 앞으로는 그 거리를 조금씩 늘려야 한다.


더 오래 달리며 나를 통제하는 훈련. 더 천천히 달리며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훈련. 이런 훈련이 쌓인다면 풀코스 후반부에 무너지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기초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미 어느 정도 달려 본 사람일수록 더 어렵다.


‘나는 이미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인데.’
‘나는 이미 이 정도는 달릴 수 있는 사람인데.’


이런 생각이 기초 훈련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이승엽 선수조차 매일 티배팅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기초는 초보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가고 싶은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너지지 않는 몸을 만드는 것이며 기록보다 먼저 쌓아야 할 것은 끝까지 나를 데려가는 기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Zone 2 달리기 훈련을 놓지 않을 것이다. 더 천천히, 더 오래, 더 단단하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사람만이 어쩌면 더 멀리 갈 수 있으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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