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근데 장소가 파리

by 오늘영

파리의 메트로와 부산의 지하철


아침 6시, 숙소를 나와 샹젤리제 거리의 프랭클린. 디. 루스벨트역(Franklin D. Roosevelt)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파리를 떠나 리옹으로 가는 날이다. 10월 말의 날씨는 선선하고 좋았지만, 새벽 지하철을 동양인 여자애 혼자 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긴장도가 높았다. 어제 외워뒀던 지하철역 이름, 타야 할 방향을 되뇌면서 지하철 승강장을 통과했고 이동하는 내내 이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한 관광객 행세를 하지 않았으므로, 파리의 메트로 내부에서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후줄근한 차림새로 캐리어를 끌고 백팩을 메고 있을 뿐.

파리 메트로의 새벽은 부산 지하철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조용히 핸드폰을 보거나 졸거나 음악을 들으며 다음 역을 향해 가는 사람들뿐이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여성은 에어팟을 꽂은 채 차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슬쩍 보면서 앉았지만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파리의 메트로가 지긋지긋한 유학생 행세로 캐리어를 대충 구석에 밀어두었지만, 계속해서 곁눈질로 캐리어를 보고 있었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문득 이렇게 긴장하며 타는 파리의 메트로가 좋은지, 아니면 여유롭게 한국어로 나오는 방송을 들으며 익숙하디 익숙한 부산 지하철이 좋은지 생각했다. 부산의 지하철에서 나는 열린 가방을 들고 타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다음이 어느 역인지 알기 위해 방송에 집중하지 않는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은 이 긴장이 힘들어 부산 지하철이 200배는 낫다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이번 역이 리옹역(gare de lyon) 임을 알렸다.


기차 출발까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pret a manger’에 들러 따뜻한 커피와 까눌레를 주문했다. 까눌레를 한입에 다 먹어버리고 역사 내의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내 뒤에 앉은 이들이 또 말한다.


“elle est coréenne(한국인이야).”


낯선 곳에서 새벽 지하철을 타러 나오느라 긴장하는 데에 에너지를 다 쓴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꾸할 여유가 없어 그냥 듣고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그 이상의 심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뭔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곧이어 나는 자리를 떴고, 기차 내의 내 좌석을 찾아가 앉았다. 내 자리는 기차칸의 맨 끝쪽의 4인석이 마주 보는 자리였다. 처음엔 나 혼자 앉아있었는데 4 좌석의 주인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같이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치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뭐지. 아침에 이은 차별을 여기서 또 받는 건가.’ 서러운 리옹행 기차여행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 나에게 인기척을 했다. 표를 보여주는데 내가 앉은자리가 그 사람의 자리였다. 그의 손에도 역시나 노트북이 들려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얼른 자리를 비켰다.

맞게 찾아간 내 좌석은 역방향이었고, 내 맞은편의 여성은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자신이 읽던 일간지에 눈을 돌렸다. 나는 먼지 낀 오렌지색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창밖 같은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건 없었다. 바깥은 초겨울 추위로 기온이 낮았고, 열차 안은 따뜻해 김이 서렸다. 영화같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는커녕 빛 때문에 눈이 부셔 가림막을 칠 뿐이었다. 차창에서 눈을 뗀 내 시선이 맞은 편의 여성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녀는 일간지의 어느 부분을 읽는지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여행은 이만하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도 내 일상이 갖고 싶었다. 처음 타야 하는 새벽의 지하철, 처음 가는 지역, 처음 먹어보는 음식 이런 것들 말고 내 일상이 갖고 싶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익숙한 라디오방송을 듣고, 조금 걸어 나가 지하철을 탄 뒤 늘 그 자리에 있는 금정산 봉우리를 보며 출근하는 일상이 갖고 싶었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먼지 낀 오렌지색 창밖이 환했다. 2시간 뒤 리옹 파 듀(lyon part-dieu) 역에 도착했다. 체크인 시간까지 리옹의 구시가지를 한번 돌아보며 언덕 위의 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오를 때에는 해운대에 있는 달맞이고개를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조용한 동네에 길이 정돈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언덕 위에서 리옹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앞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고, 성당 내에 들어가 잠시 앉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성당 한편에서 2유로에 초를 구매해 불을 밝히며 나도 작은 소망을 보탰다.


곧 평안한 일상을 갖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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