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단편 - 걸어야 보이는 더 많은 것들
오늘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돈이 많은 친구를 소개해 볼까 한다. 내가 이 친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나는 이름만 대도 전국, 아니 심지어 아프리카 콩고에 있는 한국사람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한국의 사립학교에 다녔다. 우리 학교는 한국의 정계와 재계를 뒤흔드는 사람들의 아들, 딸들이 다녔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친구 B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언제나 내 바로 뒤 쪽에 앉았었다. B의 아버지는 한국사람들이라면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 정도로 유명한 건설회사의 대표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그 회사의 회장이었다. B의 어머니는 국회의원을 3번이나 하셨고 미디어에도 깨끗한 이미지로 세탁돼 노출이 많이 되어 일반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분이셨다. 키도 훤칠하고 귀공자처럼 생긴 친구 B는 어릴 때부터 틈틈이 부모님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녔었다. B의 부모님은 그와 함께 외국을 나갈 때마다 그가 매일 세 번씩 갈아입어도 못 입을 정도의 멋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 그리고 부띠끄 들을 그의 방에 넘쳐 날 정도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주셨다. 또한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름만 대도 알만한 셰프인 마리오 바탈리라던가, 제이미 올리버 같은 유명한 요리사들의 파인 다이닝도 틈틈이 예약을 해주어 그가 하루 세끼를 풍족하게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은 데다가 가지고 싶은 것들은 늘 가지며 살아왔던 B여서인지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내 뒷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이미 무척 염세적이었다. B는 수업 중에나 체육시간에나 멍하니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이나, 혹은 운동장에서 밝게 웃으며 열심히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손으로 턱을 괴고 소위 그가 말하는 <시간 버리기>라는 것을 하며 하염없이 그가 가진 시간을 버려댔다. 그런 그에게 내가,
"너 대체 뭐가 그리 심심한 거야?"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라고 답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B가 했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나보다 심심해 보는 한 친구에게 말을 걸었었고, 그가 들려준 대답이 어떤 대답이었던 건 간에 나는 잠시나마 힘들어 보이는 친구를 위안한 것에 대해 대견해했었던 것 같다. 탄탄한 집안에 수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늘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고 게다가 가끔씩 염세주의적인 말도 내뱉는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B는 우리 학교는 물론 다른 학교 여학생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힘 좀 쓴다는 남자들까지도 그의 그런 분위기에 압도당해 몰래 그를 염탐하거나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쩔쩔매는, 소위 엘리트 집안만 갈 수 있는 사립학교였고 그래서 그런지 B나 나나, 그리고 학교 동급생들 역시 별 탈 없이 3년을 보내고 졸업을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 후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B도, 그리고 나 역시. 나는 졸업 후 한동안 B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친구들도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나마 내가 B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건 SNS 때문이다. 나는 B가 국내외의 많은 스타들의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과 심지어 스티븐 킹까지) 소셜 속과 여러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을 수 차례 봤다. 파리에서 열린 샤넬 컬렉션의 뒤풀이 때 쇼에 선 모델들의 SNS 사진 속에서 B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연찮게 본 NBA 농구 파이널에서 그가 마이클 조던과 함께 벤치에서 악수하고 농담하는 모습도 봤다. 심지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타란티노가 상을 수상하며,
"나의 친구 B에게 감사하다."
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 B의 묘한 매력이라면 아마 엔디 워홀이나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왔어도 이 친구와 연애를 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전화를 받는다.
“저기..., 나 B야. 잘 지내?”
오래간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전역한 나는 고등학교 이후 약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답변과는 상관없이 바로 말을 이었다.
"좀 만나고 싶은데.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방금 전 한국에 들어온 친구 B를 7년 만에 만난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 하고 싶어 졌어. 딱히 한국에 친한 친구도 없고. 그나마 너와는 고등학교 때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어서.”
친구 B는 말을 이어간다.
“그러고 보니 그림도 못 그리고, 공부도 못하고, 글도 못쓰고, 게다가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죽어버리자니 뭐 그것도 좀 시시하고, 그래서 일단 정말 쓸데없는데 가장 허무하게 돈을 써보고 싶어서 너에게 부탁해. 더럽게 비싸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떡볶이집을 오픈할까 하는데 내 명의로는 사업자를 내기가 좀 애매해. 부모님 체면도 있고 말이지. 강남역 사거리 바로 앞에 있는 가장 큰 건물 1층 200평 정도를 빌려서 시작을 해볼까 하는데 네 명의로 해도 되겠지? 대신 네가 그곳의 매니저로 일하는 조건으로 월 1,000만 원을 줄게. 직원은 20명 정도를 뽑을 거니까 너는 일할 필요도 없어.”
사실 나 역시 그다지 돈이 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 1,000만 원이라니.
나는 바로 수락한다.
B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땅의 가장 좋은 위치의 음식점이 계약되었고 그는 나를 통해 바로 직원들을 고용했다. 오픈은 그 이틀 뒤가 되었다.
“주방은? 셰프는? 주방집기는? 요리, 음식에 관한 건 어떻게 되는 거야?”
라고 내가 묻자 B는,
“아, 요리는 그냥 아무 떡볶이나 대충 미리 사놓고 전자레인지에 대충 데워서 나무젓가락과 접시에 해서 내놓으면 돼. 반찬은 단무지 하나면 되고, 물은 셀프서비스. 메뉴는 단 한 가지, 더럽게 맛없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떡볶이야. 우리는 그 이름과 같은 메뉴를 판매하는 거고. 떡볶이는 1인분, 약 200g에 10만 원이야.”
나는 좀 화가 났다. 아무리 돈이 많고 염세주의적이고 그래서 그냥 쓸데없는데 돈을 펑펑 쓰고 싶어서 라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오픈이 된 음식점 <더럽게 맛없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떡볶이>는 분위기는 나의 기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참고로 우리 음식점을 가장 먼저 방문한 사람은 에드 시런이다. 두 번째로 방문한 사람은 폴 메카트니다. 세 번째로 방만한 사람은 고든 램지다. 이후로 일주일 동안 어머어마한 정치인, 슈퍼스타, 예술가들이 우리 음식점을 다녀갔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 1인분에 10만 원짜리 떡볶이를 3인분씩이나 먹고 10인분 이상을 포장해갔다. 심지어 일주일째 되는 날은 북한에서 김정은까지 와 강남대로가 마비되기도 했다. 최소 2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우리 음식점은 친구 B와 그의 셀러브리티 친구들 덕에 전 세계 사람들이 최소 5시간 이상 줄을 서는 인기 음식점이 되었고 2주 뒤에는 기네스북에 <더럽게 맛없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떡볶이집>으로 등재가 되었다. 심지어 유네스코에서 까지 와서 이런 떡볶이는 보존을 해야 한다며 떠들어댔다. 뉴스나 뉴욕타임스 등 전 세계의 핫한 매거진에서도 매일같이 이 떡볶이는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한다고 기사를 실어 댔고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도 자기들의 자식들에게 교육상 이 떡볶이를 먹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결혼 금반지를 하도 팔아대서 (심지어 금반지를 팔고 이혼 후 다시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해서 다시 금반지를 선물 받아 파는 부모도 있었다) 펑화의 댐을 건설할 때 모인 금반지보다 더 많은 금이 전당포로 유입이 되었다. 한 달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져 버린 우리 떡볶이집은 맥도널드와 스타벅스 등의 큰 외식업체에서 프랜차이즈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왜지?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나는 그냥 내 돈을 말도 안 되는 일에 펑펑 쓰고 싶었을 뿐인데”
친구는 한 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내 명의는 아니니까.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뭘 해도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
나는 친구 B가 무척 불쌍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그는 펑펑 울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지만 오래간만에 그를 추억하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와인바인 확장성에 그 떡볶이 메뉴를 추가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