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인천공항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필립은 인천국제공항 입국 청사 안으로 들어섰다. 미국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을 30여 년 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다. 이 동창 녀석은 2주일 동안 서울에 머물 예정이다. 친구는 미국 국적자이니 입국 심사를 해야 할 것이고 아직 비행기도 도착하지 않아 앞으로 족히 한 시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게 생겼다. 그저 입국장을 오고 가는 외국인들을 구경할 밖에.. 어렸을 적에는 주변에서 외국인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을 만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 숫자가 적었고, 보이는 외국인들은 그저 미국인이라 생각했었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일어서라는 뜻의 한국 이름인데 사람들은 미국 이름인 줄 안다. 그는 아버지 세대와 같이 입사한 회사에서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하고 퇴직금을 챙겨 소소한 소비를 하며 남들이 말하는 인생 2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에는 IMF 사태로 더 잘 알려진 지난 1997년의 외환위기 속에서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자신감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세상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 헸다. 필립은 그 시점이 아마도 2001년일 것이라 생각한다.




2002년, 미국 JFK 공항에 도착한 필립과 이안은 영문도 모른 채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하고 미국인 여성 세관원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허둥대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경찰봉 같은 것을 휘두르며 방향을 지시하거나 간혹 가랑이 사이를 툭툭 치기도 했지만, 무관심한 말투로 명령하고 있었고 둘은 신발은 물론 바지의 벨트까지 풀고 보안 검색대를 여러 차례 들락날락하며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오랫동안 그래야 했다.


문제의 발단은 이란, 시리아, 이집트, 오만, 인도 등의 공항 세관에서 찍어놓은 출입국 도장이 빼곡한 둘의 여권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미국 세관원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입국 기록은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없었고, 화물로 부친 트렁크 안에는 전깃줄이 연결된 둥근 보온 도시락통 모양의 물건이 있었다. 자동차 속도계처럼 보이는 눈금도 그려져 있었고 금고문을 열기 위한 것과 비슷한 모양의 다이얼이 별도로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전력 조절장치에 불과했지만, 세관원의 눈에는 그것이 이란이나 파키스탄 같은 곳에서 비밀스럽게 가져온 대단히 위험한 물건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실제 테러리스트라면 그렇게 허술하게 장비를 반입하지는 않겠지만...


당시의 미국인들은 일 년 전인 2001년 알카에다에 의한 9/11 테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해는 되었지만, 일반적인 고정관념상 매부리코에 턱수염을 한 자들과 긴 비행시간으로 피곤이 가득한 출장자인 우리를 같은 부류에 넣고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임을 증명하는 일은 온전히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넓은 마음으로 미국 세관원이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이런 생각보다는 ‘미국 X’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2001년이 지나고 또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 필립은 비로소 2001년에 있었던, 그렇지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 사건(?)의 영향이 자신에게 미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9/11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이 세계무역기구_WTO에 가입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저 흘러가는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 같으나, 그것은 단순히 WTO 체제에 신규 가입 국가가 생겼다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글로벌 경제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계 경제 시장에 비교적 질이 좋고 적은 임금을 내세운 10억 명의 새로운 인력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고개를 돌려보니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고 데이비드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국 이름은 동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Dongil이라고 쓰면 "돈줄"이라 읽어대서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쓴다. 녀석의 머리가 좀 희어졌지만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둘은 반갑다는 표현보다는 그저 웃었다.


"우선 호텔로 가서 체크인하는 게 어때? 피곤하잖아?". 필립이 물었다,


"자면서 와서 피곤하지는 않은데, 아직 낮이니 일단 짐부터 방에 넣어놓고 커피나 한 잔 하자. 서울이 멀긴 머네..."


둘은 공항을 나와 서울의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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