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데이비드를 태운 승용차는 한 시간 남짓 달려 남산 중턱에 있는 H호텔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풍경이 눈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익숙해. 더 크고 화려한 건물들도 많아졌고 도로도 미국보다 훨씬 멋진데..."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뭔 소리냐? 필마는 뭐고 의구는 또 뭐야? "
"네가 아는 사람들이 좀 더 늙었겠지만 서울의 산과 강은 그대로이니 눈에 익숙하겠지. 그런데 넌 학생 때 그나마 조금 알던 단어도 다 잊어버린 모양이네."
"솔직히 책, 그것도 한국책을 읽을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사실 말하고 듣는 건 그래도 되는데, 쓰는 건 잘 안된다. 맞춤법을 잘 몰라서 카카오톡도 보이스로 하거든. AI가 엄청 발전한 거 같어"
"AI는 무슨.. 하긴 자동차에서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너니 이해해야지.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다 너 같지는 않지?"
데이비드는 호텔 리셉션에게 여권을 내밀며 체크인을 하는데 정신 사납다는 듯 필립의 말을 일부러 무시하는 중이다. 필립은 언젠가 데이비드와 문자로 잡담을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녀석이 회사에서 장기렌트를 하던 BMW 차량을 반납하는 날 자동차에서도 블루투스가 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 적이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데이비드는 벨보이에게 팁을 주면서 트렁크를 방에 가져다 놓아달라 부탁했다.
"커피부터 한 잔 해야겠는데, 호텔 말고 밖으로 나가서.. 호텔에는 앞으로 계속 있을 테니 말이지.."
호텔 근처의 커피 전문점.
테이블에는 머그에 담긴 따듯한 아메리카노가 놓여있다.
“야, 이거 좀 나 으스스한데…”
“날씨도 좋은데 뭐가 으스스 해?”
데이비드는 손으로 커피 머그잔을 가리켰다. 머그잔에는 커피숍이름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영어가 적혀 있을 뿐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
“이래도 안 으스스해? 커피숍 이름이 Coffin (관;棺)이고 머그잔에는 매장용이라고 씌어 있는데!”
“미국 사람이 어째 영어를 나보다 모른다니? 시차 적응이 안 되나? ‘C-O-F-F-I-N’ 이 아니고 ‘C-O-F-F- I-N-E’라고 씌어 있구먼. 그리고 매장용이라고 하는 건 이 커피를 파는 장소에서 사용하는 컵이라는 뜻이잖어. 답답하네..."
필립은 냅킨을 한 장 가져와 볼펜으로 글을 적어 보여주었다.
“매장용(賣場用), 매장용(埋葬用), 매장용(埋藏用)이 각각 한자로 다른데 네가 한글도 잘 모르고 한자를 한 개도 몰라서 그런 황당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그냥 문맹이라고 해도 할 말 없겠다.”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데이비드의 말이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을 보면 다른 것이 연상되기 마련인 것이 사람의 습성이고,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류가 발전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립 역시 간혹 길거리의 간판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 않았다. 최근에는 "Edible Coffee"라는 상호의 커피숍을 보았는데, 사장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상호인지 그저 생간 나는 대로 만든 것인지 헷갈렸다. 먹을 수 있는 커피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 궁금했었다.
"매장용이건 미장용이건 모르겠고, 내가 이번에 한국 와서 종합검진도 받을 예정이어서 조금 예민했을 수도 있어. 미국에서 종합검진받으려면 너무 비싸서 비행기 타고 와서 좋은 서비스받아도 남는 장사이긴 한데, 그래도 워낙 오랫동안 건강검진을 받지 않아서 약간 걱정도 된다고. 혹시 뭐 나쁜 거 나올까 봐서.."
"그건 뭐 나도 인정. 그러니까 평소에 건강관리도 하고, 집 분위기도 돌보고 가구들도 방향 잘 맞춰서 놓고 그러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가구 방향? 넌 무슨 조선 시대냐? 화성에 가서 살겠다고 하는 21세기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그게 그렇지 않다고. 풍수(風水)라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되니 미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고 미개한 느낌도 들 수 있긴 해. 그렇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연과의 관계, 사람 간의 관계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만들고 준비해 온 것이라고 보면 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이지. 그래서 풍수를 미신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한국인들이 살아가는데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편안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라고 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나?"
"그러니까 풍수니 방위니 하는 것들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거야?"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 마음이 편하면 행복해지니 건강도 해칠 일이 없다는 거야. 그런 차원에서 보면 서울도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구."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다 행복한 건 아니잖아. 오히려 복잡하고 더 힘들고 외롭고 뭐 그런 게 큰 도시의 일반적인 특징 아니냐?"
"작은 시골은 뭐 안 그런 줄 알어? 호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도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 불편하다구. 원래 사는 게 다 힘든 거라고 하잖아. 석가모니도 삼사라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고, 그리스인들은 삶을 비극적 서사시로 여겨서 카타르시스를 갈구했잖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지금까지 죄를 뉘우치면서 신을 찾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우리 조상들이 풍수를 찾아낸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이는데."
"그러니까 결국 서울 사람들은 그 풍수 덕분에 그나마 덜 고통스럽다는 말이 되는거네.."
"내일부터 며칠 서울 구경이나 하지. 친구도 한 명 더 불러서 밥도먹고 잊어버린 한국말도 좀 배우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일찍자라. 내일 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