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내가 똑같이 좋아하는게 있는가? 우리 아빠와 나는 정말 똑같이 좋아하는 것이 만년필이다. 나는 그냥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이정도이지만 아빠는 만년필을 판매하는 매장을 만나면 들어가서 안 나오신다. 조용히 기다리기도 하고, 따로 쇼핑몰을 한바퀴 휘 돌고 와도 아빠는 그 자리에 계신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고 했던가? 아빠는 만년필을 파는 곳이면 무조건 들린다. 그리고 안나온다. 결국은 나오라고 채근하고 싸워야 나올 수 있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게 된 지금은 그렇게 혼나야지만 나오는 귀여운 아빠의 모습은 잘 볼 수 없다. 하지만 어제는 그 모든 일련의 상황이 상상이 가서 너무 좋았고 빙긋 웃음이 났다.
퇴근 뒤, 눈썹 문신 예약이 있어서 갔다가 저녁을 먹으니 11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치우고 나니 십여분이 지나면 밤 12시가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딸! 뭐해?"
"나? 눈썹 문신 받고 밥 먹었어. 아빠는?"
"아빤 먹었지. 밥 다 먹으면, 와."
"오늘?"
"응 늦어도 오늘 와. 생일 선물 있어"
생일 선물이 있다는 말에 엄마는 날짜도 지났고, 시간도 늦고 눈썹 문신하고 왔으면 아픈데 뭘 오라고 하냐고 어김없이 타박을 하셨다. 아빠의 의견은 완강했고 어차피 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계시니 금방 다녀오자는 생각에 대충 치우고 친정으로 향했다.
요란 벅적지근하게 들어가면서 내가 집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아빠는 후다닥 일어나더니 어딘가에서 작은 쇼핑백을 가지고 오셨다. 종이백에는 한번 선물 받았던 볼펜의 브랜드가 적혀있었다.
"열어봐"
이미 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인지 벅벅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하늘색 영롱한 뚜껑이 있는 펜이었다.
'뚜껑이 있네? 뚜꺼엉?'
볼펜일까 만년필일까 두근두근 했다. 펜 뚜껑이 열리면서 마지막 펜 촉을 볼 때까지의 쫄깃함이란! 사주신 펜은 만년필이었다. 심지어, 원하는 잉크를 주사기처럼 빨아들였다가 쓸 수 있는 펜이었다. 신기한 아이템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사용법을 물어보고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키트로 같이 들어있던 잉크를 꽂아서 내 이름 아빠이름 엄마 이름 남편 이름을 적어보고 싸인도 해보았다. 일반 볼펜과는 다르게 미끄러지듯 종이 위에서 춤을 추는 펜 촉 느낌에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당신은 저거 김주임 줄라고 샀어? 아니 펜 치고는 헉!하게 비싸서 본인 쓸라고 산 줄 알았더니 딸꺼였어? 저런거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엄청 좋아하네??"
"응! 아빠가 사준거 진짜 좋아. 펜 겉에 색도 좋고 느낌도 좋고 잉크 충전해서 쓰는 것도 좋아."
"그런데 당신은 왜 말을 안해? 나는 지금까지도 몰랐네?"
아무말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던 아빠는 엄마에게 이 만년필을 샀는지도, 또 나에게 주려고 했는지도 모르셨나보다. 아빠와 나와 둘만의 비밀이 있는 만큼, 아빠도 엄마에게 비밀로 하셨나보다. 이 펜이 오기까지 아무말도 안하면서도 은근히 좋아하고, 신나했을 아빠를 생각하니 뭔가 귀엽다.
내가 책 출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모른다. 다른 이유는 없고, 엄마는 뭔가 실물을 보여줘야지만 믿을 것 같아서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어쩌다보니 아빠와 나만의 비밀이 되어버렸다. 만년필을 사주고는 싶은데 컴퓨터로 일하고 만년필을 쓸 일이 없을테니 주구장창 보기만 하셨었는데 딸이 책을 낸다니 큰 마음을 먹고 사주신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아빠와 눈을 맞추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라는 격려와 응원의 마음이 담긴 펜이라는 무언의 끄덕임.
잘 쓰겠다. 아빠의 마음을 안다는 무언의 끄덕임.
날이 밝자마자 가지고 있던 깃털 펜과 아빠가 사주신 만년필로 글씨를 써보았다.
두가지 펜의 서로 다른 매력이 있지만 아무래도 휴대하기 좋은 것은 아빠가 사주신 펜이 아닐까?
내가 쓰고 있는 책이 잘 됬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엇보다 아빠에게 좋은 만년필을 사드리고 싶다.
(그런데 요즘은 쓰라는 동그라미 아파트보다 이 연재가 더 재미있다. 나중에 후회 하지말고 얼른 써야 되는데 왜 이게 더 재미있는 것인가...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