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꼬박, 한 달 내 일하면 한 학기 동안 쓸 돈을 벌 수 있다며 방학 때마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아니 살 것도 아니면서 자꾸 물어봐. 귀찮게. 살 건지 안 살 건지 어떻게 아냐고? 행색을 보면 딱 알지. 돈 있는 사람들은 달라."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갓 스무 살이 된 우리들은 친구가 들려주는 부자의 세계가 그저 신기했다. 매장 들어올 때 이 옷을 살만한 손님인지 아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면 답이 딱! 나온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험 끝난 내 손을 잡고 좋은 옷 사주겠다고 백화점을 향하던 엄마의 웃음이. 평소와는 달리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신발장 안에 있는 구두를 꺼내 신으셨던 세련된 엄마가.
가방, 신고 있는 신발. 살고 있는 동네나 끌고 다니는 차. 출신 학교나 다니는 직장의 이름.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정보만으로, 그것이 마치 상대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할 때가 많다. 보이는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획득하기 위해 집착하며 사는 이유다. 획득하지 못했을 땐 거짓으로라도 있어 보이려고 안달하며 산다. 누구 탓을 할까. 서로가 서로의 비교 대상이 되고 어떻게든 나의 우월함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을. 상대 평가는 그 어떤 잣대보다 잔혹하다. 우열을 가르는 대상은 내 옆사람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내가 사는 사회다.
얼마 전 아이의 구강검진으로 오랜만에 치과에 갔다. 다행히 큰 아이 둘은 가벼운 치료로 끝났는데 막둥이가 문제였다. 8개의 충치가 있으니 병원을 4번 혹은 5번을 와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다 큰일. 산속에서 살게 된 뒤로 병원을 자주 찾지 않아 생긴 일이 아닌가.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아이의 병원 진료가 시작됐다.
산에도 사람이 살 수 있나, 춥지는 않나, 호기심을 보이던 간호사는 몇 번 얼굴을 마주하자 말이 많아졌다. "어린이 치과를 가면 같은 치료를 해도 돈이 엄청 많이 들거든요. 애들이 기특하네. 너희들 덕분에 엄마 돈 벌었다." 아이들에게도 특유의 친근함을 표현하며 가까워졌다. 마지막 진료 날이었나. 유독 치료가 오래 걸렸다.
“나도 애들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이쯤 나이가 드니까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사람이 밑을 보고 살아야 행복하긴 하지.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자꾸 위를 보고 살게 돼. 그래서 저도 이렇게 열심히 벌고 있어요. 돈 벌어야 우리 애 학원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거든. 아직 젊은데."
몇 번의 치료 기간 동안 학원 같은 곳에 가지 않고 동생을 따라오는 언니들을 보며, 대한민국 1%네, 행복하겠다고 매번 말하던 그녀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듯했다. 언니 같은 마음이었을까. 다정한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그녀의 말에 큰 대꾸 없이 ‘그렇죠.’하는 긍정의 고갯짓을 하고 치과를 나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원 아래 도넛 가게에서 꽈배기 3개를 사서 아이들 입에 물려주고 한참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는데 큰 애가 물었다.
"엄마, 왜 아까 그 아줌마가 밑을 보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말에 아무 말도 안 했어?"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에게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이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낯선 이에게 때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냥 웃고 말았을 뿐인데, 아이의 심기가 불편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항상 흙투성이 신발을 신고 가서 병원 바닥을 더럽히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말한 거라고 둘째가 보탰다. 아직 어려서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간호사의 말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그들과 달라서 아마도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
"우리 가족은 다른 행복을 찾아서 산으로 올라왔잖아. 너희가 학원 다니는 시간보다 집에서 뒹굴거리며 읽고, 쓰고, 노는 시간이 엄마는 더 값지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살지만, 사는 모습도 생각도 사람마다 달리서 그 아줌마에게는 우리의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였을 거야."
두서없이 한참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그녀의 태도를 반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를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엔 수많은 그녀들이 있을 테니까. 그들보다 우리가 우월한 것도 아니오, 그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들보다 우리가 잘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는 충분히 우리만의 행복을 찾고 있다고.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엄마, 다음에 그 아줌마를 보면 꼭 말해줘야겠어. 밑을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나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이해할까 싶어 주저리주저리 했던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딸아이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 우리가 그 아줌마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비슷한 사람들의 때때로 만나겠지. 그럴 때마다 생각하자. 삶은 위아래가 없다고. 그저 나를 보고 살면 된다고. 상대적인 행복도 상대적인 불행도 없이, 그저 나의 행복과 나의 불행만 있다면 사는 게 그리 괴롭진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