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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Oct 22. 2023

게으른 관계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과 연결된다.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동료, 각종 모임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깊은 만남부터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만남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까. 사람과의 관계는 크기가 크든 적든 다양한 감정과 행동을 유발한다. 그것들은 관계를 맺는 이상 피할 수 없다.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별로였던 나는 관계에서 대게 '을'의 위치에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로부터 따돌림받은 경험과 부모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환경들은 나를 늘 애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호감을 살만한 외모나 유머러스한 성격 혹은 리더십 같은 것이 나에겐 없기 때문에 잘 웃어주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내 주변엔 아무도 없을 거라는 불안이 있었다.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고, 눈치 보고, 조금이라도 표정이나 말투가 달라지면 나 때문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잘 웃고 잘 들어주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혹여나 진짜 나를 알면 이 사람들이 떠나갈까 싶어 더욱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문제는 상대는 내가 애쓰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상처는 속으로 곪았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마음도 여리고 외로움도 많은 친구였다. 그녀는 줄곧 남자 친구와 다퉜는데 그때마다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엔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누구와 만나고 있어도 그녀의 전화를 가장 최우선으로 했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나를 믿고 깊은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꺼내는 그녀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남자 친구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그녀를 무시하는 것 같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녀를 달래고 여러 해결책도 찾아보고 알려줬다. 너를 더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상황은 반복됐다. 급기야 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하대 받고 있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그 순간, 나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10년 넘게 이어오던 우정이 순식간에 끝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마다 꿈에 그녀가 나타난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은 행복한지 궁금하지만 물어볼 곳도 없다. 꿈에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내가 좀 더 들어줄걸. 내가 좀 더 참아볼걸. 내가 좀 더 감싸줬어야 했는데. 자책하는 시간을 여러 해 보냈다. 그때의 기억은 관계에 있어서 더욱 나를 약자로 만들었다.     


그 후 더욱 웬만하면 참고, 듣고, 웃는 일들을 반복했다. 뒤늦게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늘 관계에 있어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정말 일방적인 피해자인가?’     

관계란 일방적일 수 없다. 무엇이 되었든 쌍방이다. 내가 매번 참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계에 있어서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늘 누군가에게 한 수 져준다는 마음, 내가 더 많이 배려하고 있다는 편견은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데 독이 되고 있었다. 참기 전에 먼저 나의 불편함을 이야기해야 했고, 받아들이지 못할 제안은 거절했어야 했고, 상대가 저지른 무례함에 대해서는 항의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관계는 오히려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자처했던 부지런한 인내는 결국 자기 연민으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작 내 안에서 몰아치던 수많은 의심과 번민들은 어쩌면 나 자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허울을 쓰고 싶어서,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스스로에게 가혹했고, 결국 상대에게도 옳지 않았다. 그 깨달음은 한동안 나를 시름시름 앓게 했다.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고 배려받지 못해 억울해하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는 참 긴 시간 이기적이었구나.’     


어차피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갉아먹는 관계에 쓰는 에너지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함께 공유한 시간으로 무르익게 두어도 괜찮다. 성급하게 주고 배려한다고 가까워지는 게 아니니까. '관계' 자체가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오히려 사람을 상대하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때때로 부작용도 생겼다. 무례한 상대에게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필요할 때는 맞붙어 언쟁을 하기도 했다. ‘쌈닭이 된 건 아닐까?’싶은 순간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끝나는 관계가 아쉬울 때도 있었다. '참을 걸'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관계는 지속해 봐야 내 삶에 그리 큰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이제 경험으로 안다. 이 또한 차차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경험이 쌓이면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맺고 끊음을 할 수 있는 경지가 오리라는 것을.     


나는 내 감정을 좀 더 소중히 하기로 했다. 조금 참고, 조금 손해 보는 약자의 삶이 아닌 건강하게 나를 드러내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로 했다. 그러니 나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나라는 사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바라봐주는 사람에게만 나의 다정함을 베풀 것이니 말이다. 의미 없는 관계의 확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천천히 늘려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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