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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언니 Nov 17. 2019

완벽한 치유의 비법

위해준 마음들이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누구나 관계를 맺다 보면 상대방에게 아쉬운 부분들이 생길 수 있다. 특히 평생을 밀접하게 함께하는 가족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 않고, 각자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성장과정에서 부모님께 아쉬운 점들있었다.

     '아빠는 왜 그렇게 나에게 부정적이고 모질게 말을 ?'

    '왜 부모님은 아직도 자신들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할?'

     '왜 상처에서 벗어나 우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부터 나는 이러한 아쉬움들이 아쉬움으로만 내 안에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내가 느꼈던 아쉬움을 다른 사람이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동생을 챙기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맘 때쯤이면 얘는 이럴 텐데. 이 상황에선 이런 도움이 필요할 텐데'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생각이 들면 실천에 옮겼다. 든든한 울타리가 있다는 느낌을 동생에게 주고 싶었다.



   불과 2년의 차이일지라도, 먼저 단계를 밟아나가는 인생선배로서 말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말해주었다. 동생이 평소 힘든 점은 없는지 의식적으로 챙겨주려 했고, 어떤 이벤트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면 기억해두었다가 반드시 어땠는지 물어보곤 했다. 금전적인 도움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을 벌기 전까지 내가 힘들었기 때문에, 동생도 그럴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매달 용돈을 챙겨주고, 개학이나 취업준비 등 돈 쓸 일이 많아지는 때가 오면 말하지 않아도 미리 더 챙겨주었다.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이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빠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부모-자식 관계를 '자식이 받는 관계'라고만 생각해서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는 관계'라고 새롭게 규정하니 더 이상 서운할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받지 못한 부분보다는 줄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었다.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내가 받은 상처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나를 채울 수 있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당해 기분이 상했더라도, 반대의 상황에서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람을 위해 사소하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복이고 선물이다.



   혹시 지워지지 않는 상처나 지속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부분을 채워주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내 안의 상처를 뛰어넘어 진정한 치유로 갈 수 있었던 나만의 비법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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