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말고 희망.
2주간 복용해야 하는 항암약, 젤로다 약봉지를 눈앞에 두고 멍 때리기를 반나절.
병원에서 맞는 주사 항암약은 내가 맞기 싫어도 피할 수 없는 피동의 상황이었지만, 경구용 항암약은 집에서 내가 아침저녁으로 먹을 수 있도록 처방이 나왔기에 내가 먹기 싫으면 의사 몰래 약을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항암의 부작용을 떠올리자면 항암약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지만, 수술 전 항암약으로 암세포가 1센티미터나 줄어들었기에 무작정 약을 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암이 얼마나 지독한 녀석이기에 온몸의 세포를 죽이는 약을 이렇게나 많이 먹어야 한다는 건지 2주 분의 두툼한 약봉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망연자실해졌다.
아침저녁으로 2주간 매일 먹고 한 주 쉰 후, 2주 간 또 먹고, 이 짓을 6개월 동안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약을 시작하면 중간에 복용을 멈출 수가 없으니 시작 전에 먹을지 말지는 고민해야 했다. 실은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오던 그날부터
'먹기 싫다, 먹기 싫다 이 약, 먹기 싫다!'
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워놓아서 나의 뇌는 스트레스로 폭파 직전이었다.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항암약 젤로다를
1. 먹는다.
2. 안 먹는다.
먹었을 경우의 장점은 심리적 안도감이다. 일단 몸속에 남아있을 미세 암세포가 활성화되지 못하도록 약을 쓰는 것이므로 먹었을 경우, 재발, 전이에 대한 심리적 부담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항암약은 정상 세포를 손상시킨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고, 부작용이라면 이젠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거부감이 생겼다.
안 먹었을 경우의 장점은 폐인이 될 정도의 부작용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재발과 전이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점이었다. 혹시나 재발이나 전이가 진행되면 약을 먹지 않은 나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었지만, 수술 전 항암약의 효과를 경험한 바 있는 내 입장에서는 항암약을 복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거라는 가정하에, 삼일 간의 고민 끝에 젤로다를 복용하기로 결심했다.
분홍색의 길쭉한 약은 생각만큼 빠르게 정상 세포들을 사멸시키지는 않았지만, 부작용의 역습은 젤로다를 복용한 후 3회 차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지문이 슬슬 사라지기 시작할 정도로 피부가 얇아지더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왔다. 팔목이 시큰시큰 아프더니 무릎도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간인지 심장인지 폐인지는 모르겠지만 흉부에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호흡의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균형 감각마저 둔해져서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빈혈 환자처럼 휘청 거렸다. 항암 회차 수가 늘어날수록 온몸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간 암 환자처럼 시커멓게 변해갔다.
온몸이 근육통과 피부 궤사로 고통스러워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니 피로감이 쌓였고, 우울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8차 항암약 중 이제 반도 못 왔는데, 이 상태로는 젤로다의 복용을 완주하기는커녕 항암 우울증으로 정신병이 생길 것 같았다. 항암약을 복용하는 동안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종교도 있지만, 몸이 너무 괴롭다 보니 기도하는 중에 욕이 나올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새벽에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다 평소 보지도 않는 tv를 틀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수만 관중의 환호성이 들리는 스테디움의 축구 경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열렬하게 환호하는 관중들의 광기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몸이 움찔거렸는데, 자세히 보니 영국 프로 축구전에서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여 골을 넣은 것이었다.
골을 넣은 선수가 '손흥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그야말로 스테디움의 관중들과 한 몸이 되어, 물개 박수를 치며 거실을 뛰어다녔다. 남들 다 자고 있는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말이다. 대부분 유럽이나 남미의 선수들로 구성된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골까지 쏘아 올리니 실로 '손흥민 선수'는 경이로웠다.
나는 항암 치료 중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손흥민 선수의 EPL 경기를 보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지속된 항암의 영향으로 계속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었는데,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보고 있자니 잠자던 심장이 요동치면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무기력증과 함께 덤으로 따라온 우울감마저도 경기를 지켜보는 동안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21-22 EPL 매치가 시작된 지 어언 한 달 정도 지나고 있었고, 마침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토트넘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내가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매치를 정주행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나는 얼른 토트넘의 경기 일정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영국에서 하는 경기라 새벽에 중계방송을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어차피 항암 부작용으로 잠을 통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에,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아직 항암치료가 많이 남았으니 이 지루한 고통의 시간을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너무 기력이 없어서 다시 입원한 서울의 요양병원에서도 새벽에 토트넘의 경기가 있는 날엔 이어폰을 꽂고 경기를 보았다. 평소엔 저혈압으로 기력이 없다가도 토트넘의 경기가 있는 날은 기분이 좋아지며 혈압이 스멀스멀 올랐다. 항암 치료로 모든 호르몬의 정상 분비가 어려워졌는데,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을 때마다 몸에서 사라진 세로토닌도 막 분출되는 듯했다.
손흥민 선수가 케인 선수와 콤비로 골을 넣는 순간들, 모우라의 패스를 받아 골로 연결하는 순간, 클루세크비스키와의 합작 골 등을 지켜보면서, 나는 기나긴 항암으로 지쳐가는 정신을 붙잡아 맬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이탈리아 출신의 콘테 감독의 열정적인 지휘와 제스처는 또 하나의 볼거리였고, 손흥민 선수의 카메라와 스파이더 맨 세리머니는 마치,
'내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내세요. 생명줄 쏘아 줄 테니, 놓지 말고 살아내세요."
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온 힘을 다해 세계무대에서 뛰어주고 있는 선수도 있는데, 이깟 항암 정도야 손흥민 선수의 노력에 비하자면 거뜬하게 이겨내야 하는 것 아닐까?!
반드시 살아내서 손흥민 선수를 만나러 토트넘 경기장에 가 보아야겠다는 버킷 리스트마저 생겼다.
'희망!'
환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 마음가짐이다.
(21-22 EPL에서 손흥민은 득점왕 상을 받았고,
나는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2022년 월드컵에 손흥민 선수 경기를 직관하러 카타르에 다녀왔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덕분에 지금도 난 23-24 EPL에서 캡틴으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를 응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