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에도 무너지지 않기
"끌유야 오늘은 우리 저녁때 병원 밥 말고 맛있는 거 먹자!"
전직 간호사 출신이었던 같은 병실 환우 언니는 막내인 나를 잘 챙겼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투병하는 암환자들이다 보니 금방 서로에게 공감대가 생겼고, 대부분 장 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운 처지였으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좋아요 언니, 뭐 먹을까요?"
안 그래도 담백한 병원밥이 슬슬 물리려던 찰나다.
"요 밑에 문어숙회 하는 집 있는데, 문어 좋아해?"
"문어요? 없어서 못 먹죠~! 안 그래도 기력이 달렸는데 오늘 문어로 몸보신 좀 해야 되겠는걸요? 근데 병원을 어떻게 빠져나가죠?"
코로나가 한 창일 때라 병원의 자유로운 출입이 제한되던 시기이다.
"배달이 있잖아. 우린 배달의 민족인 거 벌써 잊었어?"
"아... 병원에서 배달시켜 먹어도 돼요?"
"그럼~. 세상이 어느 땐데... 식당이 바로 요 밑이라 직접 병실까지 가져다줘."
환자들의 세계에서도 '배달'이라는 민족의 지혜는 삶의 희망이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린 모두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외국에서 선교 일을 하다 돌아온 같은 병실의 난소암 환자 언니도 '배달'이라는 소리에 눈을 번뜩이더니, 야심 찬 특식에 조인했다. 오랜만에 외부 음식을 먹는 우리는 조개와 전복, 홍합과 문어가 들어간 해천탕과 문어숙회를 따로 주문하여 병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해산물 파티를 했다.
코로나가 극성이던 여름날, 사람들이 식당에서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 우리는 병실 바닥에 모여 앉아 오늘의 보양식을 즐겼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암 병동에 있는 우리는 마치 죽음은 머나먼 미래의 일인 양, 오늘의 만찬을 즐겼다. 살아서, 맛있는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그렇게 요양병원에서의 2주가 훌쩍 지나고, 방사선 치료가 끝난 나는 주치의와 진료를 위해 다시 만났다. 이제 더 이상의 힘든 치료는 없기만을 기도하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방사선 치료받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검사 결과 수치상 암세포가 몸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남아 있어서 항암을 좀 더 하셔야 될 것 같아요."
"네? 선생님, 항암을 또 한다고요?!"
충격으로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는 나의 좌절을 눈치챈 주치의는 모니터의 숫자들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엔 그런 주치의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주치의는 방사선 치료 전부터 내가 수술 후 항암을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 항암? 항암을 또 한다고? 8번이나 그 독한 항암약을 맞는 바람에 죽다 살았는데, 또?!....'
내심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모든 치료가 끝날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일상으로 돌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수술 전 항암과 수술, 방사선 치료가 모두 끝나고 나니 8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치료만 받는데 일 년의 반 이상을 보낸 것도 모자라 또 항암 치료를 계속해야 된다니, 희망이 먼발치로 도망가는 것 같았다.
주치의는 추가 항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환자가 머나먼 치료의 여정을 알게 되면 심리적으로 좌절하거나 지치게 될까 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방사선 시작 전부터 추가 항암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상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로또에 당첨된 줄 알고 기뻐하다가 지난 번호임을 알게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추가 항암소식에 김이 확 새 버렸다. 항암이 힘든 건 물론이거니와 치료받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료 잘 받으셨으니 남은 항암 치료도 잘 받으실 겁니다. 치료 잘 받으시고 다음 진료 때 뵐게요."
주치의의 '환자에게 기대감 주기 작전'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은 이 치료가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안고 가볍게 치료에 임할 수 있었다. 만약 추가 항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끝날 것 같지 않은 치료로, 희망이라는 건 아예 놓아버렸을는지도 모르겠다.
몸속에 아직 암세포가 남이 있다는데 어쩔 것인가? 여기서 치료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부터 드시게 될 항암약은 젤로다라는 경구용 항암약이고요, 지금까지 해 오셨던 항암 치료만큼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종양내과 의사는 유방암, 위암, 직장암에 사용되는 항암약을 처방해 주면서 이 또한 3주에 한 번씩 8회를 투약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설사, 구토, 구내염, 근육통 등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항암의 부작용이라면 겪어 봐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 약은 탈모의 부작용은 없는 약이고, 물과 함께 복용하는 약이라서 이전에 받았던 항암치료들보다 심리적 부담은 덜했다.
3주에 한 번씩 8회를 더 견뎌야 한다니 24주, 그러니까 앞으로 6개월 간은 꼼짝없이 또 항암을 하게 된 것이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이거 저거 하겠다고 세워놓은 계획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암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데, 너무 암을 만만하게 보았다.
'내 인생이 언제 내 맘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조급한 성격 내려놓자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는 치료 좀 끝났다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시간을 쪼개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 환자는 욕심을 내려놓고, 느긋해야 하는데 말이다. 6개월 더 항암 치료받는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는 더더욱 시간에 대한 조급함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늘 스트레스를 받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병의 원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빨리빨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성공해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 또한 전 국민이 그러하듯 '성공병과 부자병'에 걸려 몸과 마음은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이렇게 환자가 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항암 치료를 빨리 끝내면 무언가 또다시 도전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제 버릇 남 못 주는 것이다.
8번에 걸친 추가 항암은 기대하지 않았던 인생의 변수였지만,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암 진단을 처음 받았을 그 시기로 돌아가서 '살 수만 있다면 항암뿐만이 아니라 산으로 들어가서 살라고 해도 감내하겠다'라고 마음먹었다.
40년 막살아서 몸에 암이 생겼는데, 1년 여의 항암 치료로 암을 제거할 수 있다면 기적이 아니겠는가? 8차 항암, 수술, 방사선 치료 후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되는 6개월의 항암 후반전을 맞이하기 위해 릴랙스 모드로 몸과 마음을 재설정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저항하는 마음이 들어봤자 치료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냥 세상이 정해 놓은 흐름에 내 몸을 맡기고, 추가로 하는 항암 치료가 내 몸속 잔여 암세포를 깡그리 데려가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