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날이 계속되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눈물부터 나왔다. 오늘 나의 비극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규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깔깔 웃음이 터져 나올 때 더욱 괴로웠다. 때때로 찾아오는 불안 초조 증상에 가슴이 답답해져 호흡이 힘들어진다고 털어놓자 심리 상담사는 나에게 "걷기"를 추천하였다. "햇살 좋을 때 좀 걸으세요."
하지만 한동안 걷지 못했다. 비가 오는 궂은날이 많기도 했지만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며 아이 셋이 모두 유치원, 학교, 학원 등을 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집에 아이들만 두고 혼자 걸으러 나갈 수 없었고 모두 데리고 걸을 용기는 없어서 망설이기만 했다. 어쩌면 그냥 핑계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 퇴근 후 저녁 시간이나, 남편이 재택근무하는 오전 등 걷고 싶다면 분명 방법은 있었다.
금쪽같은 나의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걸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서가 지나며 더위가 한풀 꺾이기도 했고 남편도 계속 운동을 권유하고 있어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 채비도 없이 모자와 마스크만 챙겨 조금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걸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별 생각이 없었다. 걷다가 왈칵 눈물이라도 쏟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처 없이 걸으며 오히려 복잡한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오로지 걷는데만 집중하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만 반응하다 보니 거창한 사색에 잠길 틈이 없었다. 집에 아침 식사를 챙겨줘야 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면 계속 계속 걷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나는 잘 걷는 편이었다.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서너 정류장 거리에 재래시장까지 불평도 없이 엄마 걸음에 맞춰 열심히 따라다녔고 친구가 놀자고 하면 귀찮기는커녕 그곳이 어디든 뛰어나갔다. 중2 때 같은 반 친구들과 등산을 갔을 때도 날다람쥐처럼 잘 올라가서 나 스스로 놀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동차 이동이 너무 당연한 캘리포니아에서 이십여 년을 살면서 걷기와는 자연히 멀어졌다. 걷는 일이 귀찮고 싫어졌고 어느새 걷는 것이 무슨 행사나 특별한 이벤트쯤 되어버렸다.
작년에 건강히 살아보겠다고 한동안 걷기 운동을 계속하다가 겨울이 찾아오고 날씨가 풀릴 무렵 코로나19가 시작되며 여태 걸을 엄두도 내지 않고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걷기 운동은 가장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참 좋은 운동이다. 두 다리가 성한 사람 누구나 편한 신발만 있으면 다른 운동 기구 필요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동작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데다가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걷는 방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무리를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좋은 날씨와 괜찮은 경치까지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 동행이 있어도 좋다. 오늘은 딸이 걷기에 동참했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하늘이 어찌나 선명하던지 "저 하늘 좀 보라"며 둘이서 한참을 감탄했다.
"엄마, 저기 보이는 구름 모양이 새 같아!" 딸이 소리쳤다. 정말 새 한 마리가 파란 하늘 중앙에 턱 하니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혹시 하늘에서 우리 아들이 엄마 힘내라며 보내준 파랑새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가 평생 사랑했던 제니와 이별한 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왜 그렇게 쉬지 않고 뛰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그나마 걷고 뛰는 것은 아직 내 마음대로 가능하지 않은가!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고, 팔을 휘젓고, 방향을 바꾸고 멈추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위로받고 안심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 앞으로 나아갈 날도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