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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애넷맘 Mar 14. 2024

그냥 나쁜 날일뿐, 나쁜 삶이 아니다.

It's just a bad day. Not a bad life. 

벌써 10년도 전, 우리 가족이 미국에 살 때였다. 남편은 타주에서 직장을 다니느라 대략 1년을 떨어져 지냈는데 남편 없이 혼자서 올망졸망 세 아이를(막내는 아직 태어나기 전) 돌보는 일이 녹녹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었고 분명 주위에 나를 도와주는 조력자들이 있었지만 함께 가정을 꾸려가던 파트너의 부재는 꽤나 큰 공백을 만들어 버렸다. 


이제 막 캘리포니아의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던가.... 그 계절의 차가운 공기와 공기가 갖고 있는 향기, 옷을 갈아입은 나무와 드높은 하늘은 점점 메말라가는 서른 중반의 아줌마를 센티멘털한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이렇게 바둥거리며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주제도 안되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엄청난 감투와 책임을 짊어진 것처럼 하루하루가 몹시 버겁고 힘이 들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운 까만 밤, 남편으로부터 화상 전화라도 걸려오면 촉촉한 젖은 붉은 눈시울을 들킬까 싶어 피곤하다는 핑계로 화상 전화 거절 버튼 누르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는데 연세 지긋한 할머니께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나를 한참 지켜보시더니 내게 와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건넨 말, "You are an amazing mom and I hope you hear that all the time.(당신은 대단한 엄마이고 항상 그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한참 동안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며 가며 얼굴 몇 번 마주쳤을 뿐인데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쩔쩔매는 모습이 눈에 밟히셨는지 고맙게도 일부러 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어메이징 맘"이라는 찬사를 해주시는데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이 만족스러울 만큼, 내 어깨가 으쓱할 만큼 무엇을 잘하고 있을 때 받는 당연한 칭찬이 아니어서일까, 발 동동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들킨 것 같아서일까, 지금 내게 꼭 필요한 한 마디였기 때문일까... 할머니의 한 마디는 내 가슴속에 진한 여운을 오래오래 남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사는 게 고단했던 나에게 큰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었다. 


요즘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중2, 중1, 초4  엄마로 사느라 그 어느 때보다 고단한 날을 보내고 있다. 올망졸망 꼬마들을 돌볼 때는 육체적으로 더 힘이 들었다면 이제는 심리적으로 가시밭 길을 걷는 기분이다. "아이고 그때는 원래 다 그런 겁니다. 옆집 애 돌보듯이 키우세요. 그냥 내버려 둬야 합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봐 주고 응원만 해주세요." 말이 쉽다.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다. 알아도 힘든 거지. 


우리 모두에게는 유난히 고단한 하루가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이 한심해 보일 때도 있다. 가족, 직장, 인간관계가 너무 버거운 책임처럼 느껴져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걸까? 아무리 애타게 물어도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아 캄캄한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필요한 건 그 옛날 그 할머니가 해줬던 것처럼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라는 단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그 말 한마디라면 우리는 또 흔들린 마음을 추스르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은 단지 나쁜 날일뿐, 나쁜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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