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너의 말로 아빠도 자란단다
제주 보름 살기를 할 때였다.
하루는 송악산을 다녀온 뒤
그곳의 돌풍이 참 무서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무서워! 하연이가 지켜줄게”
“하연이가 누구를 지켜줄 건데?”
"아빠! “
무서운 게 정말 많아졌다.
집 앞의 슈퍼마켓을 가는 일이나 버스를 타는 일,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기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일 등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들의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코로나 19 속 지금 상황에는
더더욱 모든 것이 공포스럽다.
사소하지만 이제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
무서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결혼 전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군에서 훈련을 받으며 10m 높이에서 수면으로 뛰어들고 200m 거리의 활차를 탔을 때도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신이 났다.
첫 차를 장만하고 차량이 뜸한 고속도로에서 스피드를
느끼며 위험천만한 운전을 할 때도 즐기기 바빴다.
스키나 번지점프 같은 레저는 시간이 없어 못했지
지금처럼 다치는 게 두려워 몸 사리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 모든 것이 변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잠재적 위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켜주다’라는 네 글자가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온 것도 처음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연인에게 던지는 회심의 명대사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아름답고 신성한 말이자
두려움까지 내포한 단어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를 반드시, 꼭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
“아빠가 지켜줄게.”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36개월도 안 된 딸이 아빠를 지켜준다고 했을까.
당분간은 계속 이 말을 아이에게 하겠지.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딸을 지켜주는 순간이 오면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지켜줄 수 없을 거다.
오히려 내가 보호받는 대상이 될 것이기에.
그날이 오면 딸이 내게 다시 이야기해주겠지.
“하연이가 지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