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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규 Nov 01. 2020

첫눈에 반한 사람들

들러리의 비애

지난 벙커 동행했을 때 알게 된 유럽권에서 유학 중인 여대생.
많은 인원 속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다가가 유학 경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까워졌다. 첫날 가지 못했던 맛있는 타파스 집에 같이 가고 싶다며 연락이 와서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조용조용하던 여대생과 같이 식사도 하고 산책 후 아이스크림도 먹었고 대화중 몬세라트 이야기가 나왔다.
난 한 도시에 머무는 걸 좋아해서 근교 여행이 계획에 없었지만 한 여행객에게서 몬세라트 전경을 보곤 환희에 눈물이 흘렀다는 얘기를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뷰가 아름답기로 극찬이 자자했고 워낙 근교 여행지로 유명해 동행 구하기도 쉬웠다.
결국 여대생과 나. 그리고 한 명 더 에스파냐역에서 만나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역에서 처음 만난 동행은 키가 굉장히 크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외모를 가진 남성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제외한 둘은 같은 동갑 나이였고, 여대생의 조용조용하던 말투에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몬세라트로 가는 기차+산악열차+푸니쿨라를 더해 왕복 총 32유로


모두들 아침 일찍 나온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 내가 사 온 작은 살구 파이를 꺼내 함께 나눠먹었다.
내가 자, 먹자!라고 얘기했더니 “아닙니다. 누님 먼저 드셔야죠. 저희가 어떻게 먼저..”라며 남성분이 깍듯이 내가 먼저 먹기를 기다렸다.
내 생에 처음으로  받는 어르신 대접에 민망한 순간이었다.
한 번의 환승을 거쳐 총 2시간 거리의 몬세라트에 드디어 도착했다.
도착한 곳엔 두 가지 타입의 식당이 있었는데 하나는 학교급식 타입이었고 반대편에 위치한 하나는 뷔페 타입이었다.
우리는 너무 굶주려서 뒤에 뷔페 타입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앞에 급식 타입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무래도 시내에서 먼 산꼭대기이다 보니 가성비 대비 식사 비용이 2만 원대로 꽤 비싸고 무엇보다 맛이 없었다.

몬세라트는 9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이슬람 지배 시기와 나폴레옹 전쟁, 내전 등 스페인의 오랜 역사를 고난으로 견딘 가톨릭 성지로 지금은 세계 4대 성지로 불리고 있다.
보고 있자면 전쟁을 피해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와서 수도원을 지었을까? 신앙의 힘이란 참으로 놀랍구나 하고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건축가 가우디도 어릴 적 이곳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하여 가우디 투어에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건축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스페인 사람들이 부러워 질정도로 조각과 건축에 푹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또 천사들의 합창 성가대가 유명하다고 해서 1시간 동안 한참 줄을 섰는데 알고 보니 검은 성모 마리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줄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리더가 없어 허탕이 많았다.
이거라도 보자며, 한참을 더 기다려 검은 성모 마리아가 들고 있는 공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고 우린 그곳을 금방 빠져나왔다.
그다음 동행들과 푸니쿨라를 타고 몬세라트 산 꼭대기 전경을 보러 올라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이곳이 바르셀로나구나.
왠지 우리가 어릴 적 수학여행으로 갔던 설악산이 생각났다.
주변은 전부 바위와 흙길로 트래킹 코스가 있었고 우리는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절벽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동행한 남성분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여대생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곳에 셋이서 왔지만 이미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둘의 대화는 포텐이 터졌고 저번 상황과 반대로 이번엔 내가 낄 수 없어서 그냥 잤다.
시내에 도착해 내가 잠에서 깼을 땐 이미 많은걸 공유한 둘은 서로 같은 동네에 산다며 둘 만 대화를 나눠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곤 나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는데 둘 사이가 워낙 깊어져 이쯤에서 빠져줘야겠다 싶다가도,
혼자보다 같이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해서 먹으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자고 응했다.

이번엔 두 번째로 맛있는 타파스 집에 들어갔는데 오징어 튀김과 파프리카 가루를 뿌린 문어요리.
정어리 튀김과 올리브. 3대 진미로 불리는 푸아그라 그리고 소고기 스테이크 타파스를 먹었다.
푸아그라는 처음 맛보는데 첫맛은 성게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뒷맛은 흔히 접하는 소간, 돼지 간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렇다면 나는 푸아그라보다 성게알에 한 표를 주겠노라 생각했다. 그리고 소고기 타파스는 몇 번을 먹어도 정말 맛있었다.
샹그리아와 함께 곁들여 알딸딸하게 취할 때쯤, 둘은 2차로 술집에 가기로 했고 나는 미리 예약해둔 카탈라냐 음악당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근데 순간 남자분이 본인도 플라멩코가 보고 싶다며 고민스러운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여대생은 더 조급한 마음으로 아쉬운 내색을 내비치며 2차에 가자고, 내일 떠나는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더 놀자며 졸랐다.
남성분은 줄다리기하듯 한번 더 플라멩코 공연 비용과 위치에 대해 질문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설명해줬다.
그리곤 날 음악당에 데려다주겠다며 셋이서 밤길을 걷다가 거의 다다랐을쯤,

마음을 정했다며 남성분은 여대생과 2차로 술을 더 마시겠다고 결정하고 돌아갔다.
이후 나는 공연장에 들어와 둘의 사랑을 더 감칠맛 나게 하는 조미료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졸지에 들러리가 되어버렸던 또다시 어이없는 여행이었다.
그나저나 둘은 그날 밤 잘 보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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