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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작가 Jul 11. 2024

사라진 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보물은 항상 지금, 여기, 이자리에 있었다

주말에 부리나케 외출을 하느라고 온 집이 엉망이었던 날, 차를 타고 가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아, 지금 저희가 밖에 나와 있어서요. 나오면서 정리를 못 해서……. 집이 엄청 지저분해요.”

“왜? 누구야?”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어.”

“그래? 지금 집 보러 오신대?”

“응. 그런데 너무 지저분해서.”

“그냥 한번 보여드리자. 밑져야 본전이지!”

“알겠어. 네! 집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전세 기간이 만료될 즈음 이사를 가야 하는데 우리가 나가고 새로 들어올 사람이 없었다. 언제 누가 집을 보러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게 정리해두고 있었는데, 하필 청소도 못하고 정신없이 외출한날 집을 보러 온다는 것이다. 남편은 어차피 집이 지저분해서 손님이 왔다가 그냥 갈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집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있으면서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사장님. 아,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보, 집 나갔대!”

“진짜? 거 봐, 내 말 듣기를 잘했죠?”


진심으로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집이 나가게 된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본전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횡재였다. 그날 이후 나는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곤히 잠든 새벽, 창고로 쓰던 방을 천천히 정리했다. 4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정리할 엄두를 못 내던 공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짐을 하나하나 풀어보았다. 


저건 뭐지? 이런 상자가 있었나?

행거에 걸린 옷 사이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하나가 먼지 뭉텅이와 함께 나타났다. 먼지를 털고 열어보니 온갖 만들기 재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임신하기 전 푹 빠졌던 캘리그라피, POP 재료부터 시작해서 임신을 하면서 아이를 위한 소품을 만들겠다며 사놓은 코바늘과 실, 프랑스 자수 용품들까지 한 상자에 가득했다. 재료 욕심이 많아서 성에 찰 때까지 모았던 재료들이 몇 번 쓰이지도 않고 새것처럼 고이 모셔져 있었다. 해보고 싶은 게 많았던 그때의 내 모습들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해서 관심이 생기면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하나씩 할 수 있는 기술이 많아지고 내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생기면 ‘나’라는 존재가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먹고 입는 것에 쓰는 돈은 아까웠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만드는 재료를 사는 것에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야금야금 모아둔 재료들이 큰 리빙박스를 하나 가득 채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한 박스가 더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한참 그렸던 민화 화구들을 담은 상자였다. 상자를 열고 먼지를 털며 그림 도구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첫 아이 출산 전에 그리던 그림이 4년이 넘도록 완성되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돌돌 말려 있어서 잘 펴지지 않았다. 방바닥에 그림을 놓고 양 끝을 낑낑거리며 펴다가 이 그림을 그리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는 나중에 엄마가 되고 나서도 아기 잘 때 옆에서 그림 그릴 거예요.”

“나현쌤, 지금은 쉽게 얘기하지만 막상 아이 낳고 나면 생각처럼 잘 안 될걸?”

‘아이가 자면 그냥 그 옆에서 그리면 되는 걸 뭐가 어렵다는 거지?’ 


이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 정말로 아이를 낳고 키운 4년 동안 단 한 번도 민화를 그리지 않았다. 한참 그림을 그리던 내 모습, 앞으로 아이를 낳고도 그림을 그리겠다 말하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다 만 채로 돌돌 말린 그림이 꼭 지금의 나 같아서 새벽에 차가운 골방에 앉아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닦아냈다. 


남계우, 모란꽃과 나비

짐을 정리하며 화구를 발견한 그날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는 마음이 샘처럼 퐁퐁 솟았다. 자꾸만 화구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붓도 꺼내 만져보고 종이도 꺼내서 살펴보고 물감도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하곤 했다. 아이들이 유난히 낮잠을 잘 자던 어느 날, 퐁퐁 솟은 샘이 한가득 흘러넘쳐 민화 도구가 있는 곳까지 갔다. 부스럭부스럭 종이를 펴고 물통에 물을 담았다. 동그란 접시에 까만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고운 꽃 한 송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꽃 모양 도자기 접시에 물감을 짜고 좋아하는 색을 만들어 칠하며 모란꽃 한 송이를 완성했다. 마가 되느라 흐릿해진 내 모습에도 좋아하는 색으로 곱게 물을 들였다. 


이렇게 물들인 꽃에 마음을 담아 이사를 가기 전, 그동안 잘 챙겨주신 이웃분들에게 마음을 나눴다. 아이 백일이며 돌이며 꼬박꼬박 챙겨서 예쁜 옷을 사주신 옆집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웠을 층간소음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신 아랫집, 신혼부부에서 한 아이의 부모가 된 윗집까지, 밤새 만든 쿠키와 머핀 그리고 그림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전했다. 


다음 날 아침 생각보다 빨리 이삿짐센터 분들이 오셨고 순식간에 그 많던 짐들이 커다란 트럭으로 옮겨졌다.텅 빈 공간을 보니 결혼하고 차곡차곡 살림을 꾸려갔던 시간들이, 이 공간에서 울고 웃었던 일들이 떠올라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이 방 저 방 구석구석에 고마움을 나누었다. 그렇게 집 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짐이 다 빠지니까 집이 더 훤해 보이네.”

“안녕하세요. 이전에 전세로 살던 아기 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새로운 집 주인이에요. 짐이 다 빠졌다고 그래서 궁금해서 와봤어요.”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처음 집 보러 오셨던 날, 집이 엄청 지저분했는데 어떻게 이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아, 그날이요? 부동산 사장님이 안내해주시는데 집이 좀 지저분하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기 소파에 앉아서 딱 보니까 창밖 풍경이 참 좋았어요. 여기 살면 계절 바뀔 때마다 창밖 풍경이 참 좋겠다 싶더라고요. 근처에 마트도 가깝고, 우리야 애들이 다 커서 학교 보낼 것도 아니니까 이렇게 편의시설 근처에 있으면서 조용한 곳이 더 좋았거든요. 그래서 여기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는 짐이 많아서 그랬는데 이렇게 짐이 싹 나가고 나니까 집이 더 좋아 보이네.”


그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줄 아는 분들이셨다. 온갖 짐으로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 집의 가치를 꿰뚫어볼 줄 아는 분들이셨다. 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힘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엄마’에 가려져 있던 ‘나’를 잘 살펴보는 힘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일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정말 중요한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넣어두고 관심을 주지 않아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는 사실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정성스럽게 보살피지 않았을 뿐이었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들추어보고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나’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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