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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Jul 31. 2023

엄마에게 남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해

상처도 좋은 영감이 된다

여아 100명 : 남아 116.5명


내가 태어난 1990년은 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한 해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남아선호사상에다가, 하필이면 드세고 강하다는 백말띠였기 때문에 남자아이가 많이 태어난 해였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남아선호사상이 없었지만, 1920년대에 태어난 친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다. 그래서 나는 귀하디 귀한 외동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음에도 할머니로 인해 남녀차별을 호되게 겪어봤고, 종종 딸로 태어나 아들과 차별받는 설움을 다룬 글을 볼 때마다 동감했다.


아홉 살 추석 때, 할머니는 나를 몰래 불렀다. 평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할머니가 한 말은 이거였다.


"엄마에게 가서 남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해."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지만, 상당히 기분이 나빴던 감정이 들었던 건 기억한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을 때 난 할머니에게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남아선호사상. 그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 첫 번째 웹소설은 바로 남아선호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들로 태어났어야 할 여주, 남자 왕위계승자만이 가진 특징을 갖고 태어난 여주. 그 여주가 부모의 욕심으로 남장을 하고 한 나라의 후계자로 자란다. 그러나 정당하게 왕위를 이을 남동생이 태어나고, 여주는 남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로 향한다.


붉은 눈의 공주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쓰다 보니 내가 이 소설을 쓰면서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남아선호사상의 큰 피해자가 결국에는 그 아픔을 딛고 멋지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쓰면서, 나도 과거의 아픔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힘들고 아팠던 상처와 갈등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종종 작가들은 영감을 어디서 찾냐는 질문을 듣곤 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소재는 떠올리기 힘들다. 대게는 경험에서 소재를 찾고는 하는데,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작가에게는 중요한 원천소스가 된다.


예전에는 부정적으로만 보던 트라우마는 이야기에 있어 가장 강력한 갈등 요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강한 힘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힘들거나 어려운 일, 사람 사이의 갈등, 각종 스트레스, 누군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의 고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생겼다. 좋은 경험도 소중하지만, 글을 쓰고 소재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부정적인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된다.


날이 좋기만 하고, 하늘에 태양만 뜨면 땅이 메마르고 가뭄이 든다.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천둥번개도 치고, 태풍도 왔다가, 눈도 내리는 다양한 변화가 있어야 세상이 풍요롭게 돌아간다. 그건 작가의 삶에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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