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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멈추지 않으면...

과속을 하면 사고가 나를 멈추게 한다.

by 글하루

내가 멈추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한다.

과속을 하면 사고가 멈추게 하고

술을 멈추지 않으면 간이 멈추게 하고

욕심을 멈추지 않으면 파산이 멈추게 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장례식장의 사모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내 첫 직장은 국내 5위 안에 드는 00 건설이었다.

내가 입사하던 해에 IMF가 터졌고 모두 힘들어졌다.

본사 견적실에서 처음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는데

막내의 생활은 수많은 잔일로 채워졌고

견적실의 특성상 야근이 많아 보통 퇴근은 밤 9시~10시였다.


견적실 생활 반년이 지나니 저녁마다 먹던 중국집 음식 때문에 5킬로가 늘었다.

배둘레햄이 되어 괜찮던 몸은 아저씨 배가 되어 볼품없게 되었다.

견적실은 국내견적팀과 해외견적팀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국내견적팀에 속해 있었다.

그때 유 과장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경력직으로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하셨다.

나의 직속상관 과장님으로 국내견적팀의 실무 책임을 맡으셨다.


과장님은 집이 인천 부평이었고 본사는 삼성동에 있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아이파크 아파트가 있다.)

출퇴근 시간이 만만치 않으셨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침이면 같이 출근하고 저녁이면 같이 퇴근하니

얼마나 먼 곳에서 오고 얼마나 먼 곳으로 가는지 서로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견적이란 게 말이 쉽지 해보면 일이 끝이 없고 해도 해도 답이 없다.

하나의 공사를 따기 위해서는 10군데 정도 입찰을 해야 했다.

공사 주주를 위한 입찰견적을 해야 하고,

공사 수주를 한 후에는 원가 계산을 위한 시공견적을 다시 한다.


IMF때라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자재값의 상승과 변화에

어제 한 견적은 의미가 없어지곤 했다.

거기에서 책임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니 나침반 없이 산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런 일의 실무책임을 유 과장님이 맡고 계셨다.

IMF의 최전선에서 총처럼 돈을 쏘고 맞으며 싸웠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아파트를 짓는 아파트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안전모에 안전화를 신고

허리에 무전기를 차고 설계도를 보며 현장 구석구석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유 과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이런 소식을 들으니 황망했다.

나이도 40대였고 얼마 전에 차장으로 승진도 하셨다.

얼굴이 좀 까무잡잡했지만 건강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많은 직장 동료들과 거래처 사장님들이 와 계셨다.

평상시에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셨는데 업무가 과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간이 급격하게 나빠지더니 손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미망인이 된 사모님은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앉아계셨고

윤곽만 있는 유령처럼 삶은 희미해져 있었다.

조문을 하는 사람도 뭐라 말을 못 하고 조문을 받는 사모님도 뭐라 말을 못 했다.

아무 말 없이 수많은 위로와 아무 말없이 수없는 슬픔을 주고받았다.


지금도 너무 가슴 아프다.

사라지는 사람을 사라지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그 눈빛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쩌면 남은 사람도 슬프겠지만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떘을까 생각하면

시린 곳이 더 시린다.




'열심히 살았더니 병이 생기더라'는 말은 참 슬픈 말이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내가 돌보지 않은 건강이라니...

달릴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숨은 함정이라 여기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내 주변에는 이런 것들이 항상 나를 노리고 있다.

알면서 빠지는 개미지옥처럼 위험하다.


브레이크는 안전을 위해 존재한다.

생과 사의 결정하는 것이 액셀레이터가 아닌 브레이크다.

잘 달리기 위해 잘 멈춰야 한다.


달릴 때 멈추는 게 힘든 이유는 관성이 생겨서이다.

내 습관이 나의 관성이다.

무리한 습관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게 좋다.

무엇이든 무리하면 무리가 온다.

살펴보면 살필 것이 있고 살펴봐야 살필 것이 보인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한다.

내가 멈추면 달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겠지만,

남이 나를 멈추면 크게 넘어져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방어운전이란 미리 사고 날 것을 살피고 예측하며 운전하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방어운전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간단하다. 과한 것이 있다면 한 번쯤 살펴보자.




그때는 몰랐었네

지나야 알게 되지

알았을 땐 늦었었네

후회해도 소용없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때 조금만 생각할걸

너무 빠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날이


아 세월은 흘러가는걸

아 눈물이 흐르는구나

어디로 내가 흘러서 갈까

흐를 때는 모르는 걸까


- 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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