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일 -
가로등 아래 섰다.
눈이 내렸다.
불빛이 보이는 곳에는 눈이 내리고
불빛 비추지 못한 세상에 눈이 쌓였다.
언제 쌓일까 생각하는데
어느새 눈이 쌓이고
눈을 밟으며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또박또박 찍힌 발자국이 길게 늘어서고
서성이는 발자국이 내 주위에 찍혀 있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하얀 눈이 나를 기다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방황한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단 걸.
밤에 산책을 나갔다.
일기예보를 보지 못하고 나선 산책길에 눈이 내렸다.
흩날리던 눈은 점점 굵어지고 하늘을 가득 채웠다.
모자를 눌러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장갑도 끼고 있었고 혹시나 챙긴 붙이는 핫팩도 있었다.
오래 걸어도 좋을 완벽한 복장.
눈이 반가웠다.
마음껏 눈을 걸어도 좋을 환경.
그래 오늘은 날을 잡았다.
내 오래도록 걸어보리라.
눈길을 걸으면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과거는 발자국으로 길게 남아 있고
돌아보면 한눈에 보이고
앞을 보면 걷지 않은 하얀 눈이 기다린다.
돌아보면 발자국의 흔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가늠하게 하지만
어느 골목을 만나고 어느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모자에 눈이 쌓이면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쌓이고 하루가 쌓이고
인생이 쌓이는 기분이 든다.
눈을 털어버리면 잠깐 추억을 터는 기분도 든다.
눈길을 걸으면 고스란히 남는 흔적이 좋다.
눈에 선명히 보이는 흘러간 시간과
흘러가는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을 바로바로 확인한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던 눈에 찍힌 발자국을 돌아보며
내가 방황을 하고 있나 생각도 했다.
하지만 문득 '그래 저건 과거야, 그냥 과거일 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눈을 맞으며 걷으면 기분이 좋다.
흔들려도 방황해도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 모든 것이 내 길이었으니
그냥 눈을 밟으며 걷는 것이 좋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