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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Mar 22. 2022

지하철 콰지모도, 오늘도 안녕?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유

지하철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를 직접 실감할 수 있다. 남녀노소는 당연하고, 게임하는 사람, 노래를 듣는 사람, 의자가 있지만 서있는 사람,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사람, 짱 박혀서 글 쓰는 사람(나 같은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있으니, 아니 동물이 있으니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탄다.  동물은 아마도 합법적으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누군가와 항상 동행하는 그 동물은  맹인 안내견인 골든 리트리버이다.

퇴근시간이기에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두 발로 서있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 복잡한 공간이다. 네발로 바닥에 서 있다가 혹여나 사람들의 발에 차이지나 않을까, 인파에 떠 밀리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앞선다. 사람도 많고 계단도 많은 이 험난한 퇴근길을 어떻완수할지 안내견뿐만이 아니라 같이 동행한 사람에게도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짠한 마음까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환승역에 다다러서야 안내견은 거침없는 몸짓으로 얘기한. 그런 싸구려 동정심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고. 개도 개 나름이겠지만. 이 구역은 내구역이라는 자신감과 노련함으로 계단을 오르고 동행자를 리드한다. 결국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틋함은 접어 두기로 했다.




오늘도 직장에서의 하루가 만만치 않았다. 밀려오는 업무와 이해관계속에서 사람들과의 줄타기는 퇴근시간, 나의 멘탈을 털기에 충분했.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 터벅터벅 지하철에 올랐다. 오늘은 책 읽기고 글쓰기 건 간에 그냥 머리를 기대고 바보처럼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 그럴 때는 그냥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면서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지하철의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맹인 안내견이 등장한다. 근데 마음 한구석이 또 이상하다. 비록 동물이지만 인간의 동반자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히 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몽글몽글해진다. 그에게 느껴지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번에 느꼈던 측은지심이나 애틋함은 아니었다. 오늘 느껴지는 마음은 다소 전우애 같은 느낌이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측은지심과 동정심과 다른 슬픔이 느껴진다. 개나 줘버리라는 싸구려 동정심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다. 

그의 눈에서 '숙명슬픔'이라는 알듯 말듯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빅토르 위고가 지은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의 시작은 '숙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한다. 노트르담 성당의 어딘가에 적힌 숙명이라는 단어가  빅토르 위고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콰지모도의  에스메랄다를 향한 러브스토리가 주내용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콰지모도를 능가하는 아주 매력덩어리가 있으니, 그는 바로 성당의 주교프롤로이다. 프롤로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콰지모도와 대립각을 만들어낸다. 꼽추라는 콰지모도 캐릭터도 장난 아니지만 프롤로전형적인 악인 캐릭터로 미친 존재감을 선사한다.  주인공과 악인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캐릭터 같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둘  노트르담의 성당에 살고 있는 남성이라는 점, 성당에서 각자의 숙명이라는 굴레에 갇혀있고, 그에 반하는 인간적 본능에 갈등한다는 점이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여성을 향한 남성적 본능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솔직한 마음이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두 명의 남성의 마음은 요동을 친다. 여기서 주인공과 악인은 갈림길에 선다. 콰지모도는 그녀를 지켜주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프롤로소유하려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두 명의  남성은 나름의 방식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을 마주하며 고군분투한다.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그 누구도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고 소설은 끝이 난다.




뜬금없는 소설 이야기로 한참이나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네발로 버티고 있는 맹인 안내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 콰지모도가 생각났다(그래서 나는 맹인 안내견을 '지하철 콰지모도'라 부르기로 했다). 개라는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들로부터 온갖 설움을 받으며, 항상 비하의 대상이 된 동물인 개. 그만큼 동물적 본능을 주체하지 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처럼 살아온 그들일 것이다. 그런 동물이 자신의 본능을 자제하고 한 명의 인간의 삶에 들어와 사회적 소명을 수행한다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로써 존경심마저 생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답지 않은 의젓함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우러나오기도 . 이 슬픔은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에스메랄다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콰지모도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콰지모도는 과연 슬펐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콰지모도는 꼽추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노트르담의 성당 종지기로 숨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런 그가 에스메랄다만나고 그녀를 통해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느끼고 본인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자유를 꿈꾸는 단 한 명의 인격체로만 남게 된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꼽추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종지기도 아닌 자기 자신, 쾨지모도로써의 인생과 만나게 된다.  숙명이라는 거대한 굴레에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선택하는 콰지모도를 보니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 포개어진다. 그 감정충분히 감동이라 할만하다.  비록 견디기 힘든 현실일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더욱 감동적일 수 있다. 인생에서 사랑하고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지하철 콰지모도가 나에게 일깨워 주웠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의 눈빛이 아니라 감동의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숙명의 슬픔'에서 '숙명의 감동'으로 승화하는 순간 이리라.




나는 오늘도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고뇌한다. 일찌감치 이어 족이 되어, 하고 싶은 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밀려오는 업무와 지랄 맞은 팀장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지하철에 기대어 나의 숙명을 비관한다.

숙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나에게, 지하철 콰지모도는 반짝이는 감동의 눈빛으로 지긋이 쳐다보면서 말하는 듯하다.


"숙명을 더 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이제는 숙명을 감동적으로 활용하세요. 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는 가장 멋지고 이상적인 것일 게다. 반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고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것 못지않게 멋지고 감동적인 것이리라. 콰지모도는 단 한 명의 에스메랄다를 위해 사랑하고 지키고자 노력했다. 나에게는 네 명의 에스메랄다가 있으니 숙명의 굴레가 더욱 강력할 수도 다. 하지만 나는 콰지모도가 느꼈던 감동의 네 배의 감동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된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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