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어

내 추억은 33 RPM # 여름비 편

by 김기린
처음엔 그냥 걸었어. 기분도 그렇고 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데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 그냥 걸었어 중 / 작사 김준기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여름은 어느 날,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 보통 장마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태풍이 우리나라로 올지 안 올지도 모를 소식 몇 개가 지나가면, 불볕더위가 시작된다. 대략 7, 8월 즈음이다. 과일가게에 파란 수박이 놓일 무렵, 여름은 그렇게 성큼 다가오곤 했다. 물론, 봄이나 가을에도 사이사이 여름 같은 날씨가 몇 번씩있다.

봄을 만끽하기도 전에 뜨거워지는 태양이 싫다. 여름이 찾아오면 그때부터 마냥 가을을 기다린다. 내가 이처럼 여름을 유달리 싫어하는 이유는 내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인천으로 이사한 동네에는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복개천이 들어선 그곳이지만, 여름철에는 어김없이 바빴다.

태풍이 오기 전, 쌀 포대 자루에 흙이며 돌이며 가득가득 채워 마당이 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대비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은 집안 식구들의 몫이니 태풍이 오기 전, 6월경에는 어김없이 가족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아마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것은 그런 피곤한 일상의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고, 신나는 여름방학을 하던 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빠의 죽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비가 오는 여름철에는 운동장에서 야구를 못 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는 안개 낀 날이다.

아주 청명하고 맑고 상쾌한 날씨보다는 뭔가 세상이 반쯤 가려져, 몽환적 분위기마저 풍기는 안개 낀 날을 난 좋아한다. 안개가 끼면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자동차도 사람도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다니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어릴적에는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조금 여유를 갖고 살라는 의미에서 몇 번씩 안개가 끼는 것이란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여름은 특히 더워서 싫다. 지금처럼 흔한 에어컨이 없던 시절. 선풍기 한 대로 근근이 버텨야 했던 그때, 모기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방마다 모기향을 피워 놓으면 모기향에 취해 잠이 드는지, 모기를 쫓다 지쳐 잠이 드는지 모르던 계절이 여름이다.


여름은 공포물의 계절이기도 하다. 난 공포영화를 싫어하는데, 그런 것들로 더위를 쫓겠다는 아이디어는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지, 라디오까지 ‘납량특집'이 넘쳐나던 계절이 여름이다.

납량특집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전설의 고향’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내 다리 내놔!” 하던 외마디 비명과 생각보다 이뻐서 안타까웠던 ‘구미호’를 흑백 TV로 보던 그 시절. 머릿속으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총천연색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더 무서운 나머지 이불을 뒤집어쓰느라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비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계절이 여름이다.

하지만 난,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공사장에서 알. 바를 할 때 비가 오면 쉬었는데, 일당 3만 원을 못 벌어서 싫었다. 공사장에 나왔다가 되돌아가는 가장들의 한숨 소리가 안타까웠지만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똑같은 비라도 가을비는 남자의 스타일이 구겨지지 않을 정도라 한다면, 여름비는 그런 것이 없다. 인정사정없이 퍼부어 온몸이 홀딱 젖게 하여 굴복시키듯 내린다.

어릴 적 엄마가 사주신 새 신발을 싣고 불어난 냇가를 건너다 떠내려간 신발을 바라만 보았던 기억. 시간이 흘러도 빗물에 씻기지 않는 추억이다. 그때는 싫은 것보다 좋았던 게 더 많았던 시절인데 여름이 싫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름비는 금세 그치는 법이 없다.

나 역시 언제 그칠지 모르던 비가 오던 어느 날, 우산도 없이 그녀의 집 앞 어딘가에서 비를 맞고 한참을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그 비 맞던 나의 몰골이 안쓰러웠는지 "감기 걸리면 어떡해" 하며 우산을 내어 주시던, 그녀가 살던 동네 아주머니의 참 따스했던 손길은 내가 기억하는 여름날의 좋은 추억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는 마음 착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가 싶어 큰 감동과 함께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추억의 가보로 물려주어도 아쉬울 것이 없던 그 우산은 그녀와 함께 지금은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노래가 한 곡 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니,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가 바로 그 곡이다.

처음엔 '그냥 (걸음을) 걸었다'가, 그녀 집 앞에서 '그냥 (전화를) 걸었다'는 이중 의미의 제목도 재밌다.


이 노래는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던 길보드에서 시작해 방송가를 강타한 곡으로, 정말 길보드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던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곡이다. ( 노래 첫 소절에 등장하는 "여보세요?" 하던 목소리는 녹음 당시는 가수 임종환의 후배였던, 그의 아내 목소리이다. 난 특히 이 부분이 좋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를 들을 때면, 1994년의 어느 여름밤. 그녀의 집 앞에서 비를 맞고 있던 나를 발견하곤 한다.



* 가수 임종환 님은 2010년 5월 23일, 직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https://youtu.be/uWZMJs-MngI


* 사진(합성) : 임종환 2집, 새샘음반(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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