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화났다, 최숙희 작가의 그림책을 마주하며>
나의 학창 시절은 '나뭇잎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사춘기'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시골로 이사 온 이후로 늘 관계에 허우적거리고, 주눅이 들어있는 아이였다. 시골의 학교는 한 학년 당 한 학급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학급 친구들이 대게는 병설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지속된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를 한 학급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시골 아이들은 순진하다는 아빠의 이사 오기 전 설득은 틀린 말이었다. 돌아가면서 따돌림을 시키고 있었고, 친구들을 '상, 중, 하'로 나누어 편을 가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화적인 해택을 누리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오히려 더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결론은, 결국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내 옆에 남아있는 친구가 한두 명뿐이었다. 무리 속에 잘 어울리다가 외톨이가 되었다가의 반복이었지만 마무리가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내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중학교처럼 한 학급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학년 친구들의 얼굴 정도는 익힐 정도의 인원이었는데, 그냥 공부에만 몰두했다. 나의 감정을 감싸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했고, 인서울 대학에 가거나 사범대만 들어간다면 모든 과거가 리셋이 될 줄 알았다.
대학교에 와서 다행히 나의 감정을 위로해주고 다독여주는 선배 언니, 오빠들을 만났고 나 또한 관계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는데, 진짜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할 시기는 바로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였다.
언어치료실 안에서도 '사회성'이 중요시되면서 아이들에게 감정 어휘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나의 마음은 깊이 돌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순간들이 쌓여갔다. 그런데 달콤하다는 신혼 생활에서 싸움이 발생하고, 육아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솟아오르는 분노가 때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자라 가고 있다. 아이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온이 슬펐어. 소피 언니처럼~걱정이 되었어.", "엄마, 예뻐. 엄마, 좋아!", "온이, 신나!"
세 살이 된 아이의 감정은 점점 세부적으로 분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좋다, 싫다. 이 두 가지의 감정을 넘어서서 서운함, 기쁨, 슬픔, 설렘, 걱정, 두려움을 맞닥뜨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럼에도 아이는 솔직하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엄마가 화났다> 그림책은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 무렵부터 알게 된 책인데 세 살 정도가 되면 꼭 읽어주고 싶은 책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일찍 집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다. 글밥이 다소 많은 편이지만 아이에게는 그림만 보여주어도 많은 이야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나의 자신감이 있었다.
이전에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그림책을 24개월 전에 보여주었는데, 온이는 신기하게도 그림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스토리의 내부구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화났다> 책은 아이가 엄마에게 혼나는 각각의 행동 안에서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그림책이다. 그리고 엄마들에게는 자아반성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마련해준다. 나 또한 아이에 대한 고해성사를 그림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화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데, 화를 잘 표현하는 방법을 그동안 배우지 못했다. 어쩌면 90년대 이전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렇게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감정코칭, 감정을 잘 표현하는 스킬을 가르쳐주는 책, 강연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에야 세상에 당당하게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당당함보다는 '당돌함'이라는 인식이 더 컸고, 또래 사이에서도 '솔직함'은 멋지다는 인식보다는 약간은 '성격이 거친/배려하지 않는'이라는 약간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책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예쁜 말을 알려준다. 어른들의 감정코칭 책이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해보세요.'를 가르친다면, 그림책은 그림 안에서 나의 어두운 과거를 찾아주고 그때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잠시나마 과거로 되돌아가서 이런 말로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예쁜 언어를 가르쳐준다.
어제는 집에만 있기엔 억울할 정도로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마스크를 쓰고 온 가족이 꽃 카페를 다녀왔다. 커피만 테이크 아웃을 할 계획이었는데 문득 카페 안에서 판매하는 꽃다발이 갖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꽃을 받고 싶다는 표현을 연애할 때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결혼을 한 이후는 간간히, 그리고 육아를 시작한 이후는 감정을 숨겨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의 뿌루퉁함은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나, 카페 가면 꽃 사주면 안 돼? 받고 싶어."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신랑은 그동안 꽃을 너무 자주 사주어서 꽃집 사장님의 얼굴을 익힐 정도라는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섞었지만 예쁜 꽃을 하나 사주었다. 꽃을 자주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남자들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어제는 표현하고 싶었다. 요즘은 월마다 꽃을 배달해주는 꽃 구독 서비스도 있다고 부담을 열 스푼 더 얹어주었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어두웠던 과거를 다시 만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전에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면 참 좋겠지만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바쁘고 각박하기 때문에 마음을 돌볼 겨를이 없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연습이 필요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어른들에게는 많은 연습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의 감정을 잘 돌보고, 어두웠던 시간들을 위로해주는 시간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나뿐 아니라 나의 아이와 나의 아이와 함께 살아갈 원만한 시간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