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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미술’은 무엇인가?

석기자미술관(170) 서경식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

by 김석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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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2세 출신의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 전 도쿄경제대 교수의 책 《나의 일본미술 순례 1》(연립서가, 2022)을 읽고 난 뒤 쓴 글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제목에 <1>이라고 적었을 만큼 후속 작업에 열의를 불태우던 저자가 2023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의 일본미술 순례>는 한 권으로 끝났다고. 이 글을 읽은 출판사가 답을 줬다. 올해 연말, 저자의 2주기에 즈음해 2권을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원고 꼭지는 4장이라 아쉽지만, 정성껏 묶어내겠다고 했다. 반갑고 고맙다.     


분명한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인으로 살아온 저자는 평생토록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싸웠다.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물음이다. 책 제목의 ‘조선미술’이라는 표현에 저자의 그런 고민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를 자명한 본질로 보기보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여러 조건으로 규정된 ‘콘텍스트’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맥락’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뒤 월북화가 이쾌대와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 화가 변월룡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통해 한국미술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저자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다. 답을 들을 순 없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미술가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이쾌대, 신윤복, 미희 6명이다. 여기에 홍성담과 송현숙의 인터뷰가 뒤에 부록으로 실렸다. 그중에서 이쾌대와 정연두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읽으며 한국의 연구자들과는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었다. 꽤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조금 길더라도 관련 대목을 여기에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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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는 「군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그렸다. 이 두 점은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인상을 전해준다. 집단과 개인(이 말을 바꿔본다면 후지타 쓰구하루의 세계와 마쓰모토 슌스케의 세계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화의 정통적인 묘사법과 조선의 민족적 묘사법, 두 가지가 이쾌대라는 한 사람의 화가 속에 분열된 채로 상극(相克)하고 있다. 그 어느 한쪽이 이쾌대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열된 존재가 바로 이쾌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작품은 아직 발전도상에 있는 미완의 습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해방 후 조선이 분열도 전쟁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쾌대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통일된 사회에서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분열은 행복으로 지양(止揚)되어 새로운 ‘주체’에 의한 새로운 ‘표현’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이쾌대에게서 보이는 분열상은 근현대를 거치며 조선 민족에게 던져진 콘텍스트 그 자체의 충실한 반영이었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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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보고 무척이나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보라매 댄스홀」, 「상록타워」에 등장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표정과 자세, 복장에서 드러나는 취향, 이 모든 것이 뭐라 말할 수 없이 ‘한국적’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냄새마저 느껴진다. 정연두의 작품은 현대 ‘한국인’의 초상이자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형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선택하여 카탈로그 사진을 찍으려 했을 리는 없다. 그는 피사체인 인물에 흥미와 애착을 느끼지만, 대상에 정서적으로 일체화되지 않으면서 차가운 객관성을 잃지 않고 관찰한다. 그런 애착과 객관성의 미묘한 균형이 ‘정연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이야기한 ‘한국적’이란 ‘문화적 전통’이나 ‘민족적 미의식’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이런저런 ‘본질’이 아니라 ‘문맥’이다. 작가 자신도 이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그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인간은 보편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고유의 ‘문맥’ 속에 놓여 있다. ‘한국인’이란 한국인이라는 ‘본질’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정연두의 작품이 ‘한국적’인 까닭은 한국이라는 본질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맥을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다.” (121~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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