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워딩에 있지 않고 살아내는 것에 있다
'시편 35편' 원수로부터 지켜 달라는 기도
다윗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싶을 때면
하나님 앞에서 양손을 모으는 것 같다.
1)
오늘 다윗이 기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 놓은 사람들이다.
거짓 증언으로 다윗을 비난하고 선동하는 사람들이다.
2)
헌데 이 자들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다윗이 베옷을 입고 기도해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마치 다윗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처럼 함께 슬퍼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미웠을까? 얼마나 분했을까?
그 한 명 한 명의 이름들을 적으며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12 그들이 나에게 선을 악으로 갚으니
내 영혼이 낙심하여 죽을 지경이라
13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내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그들을 위해 안타깝게 부르짖었더니
내 기도가 헛되어 돌아왔구나.
3)
하지만 다윗은 시편에서 매번 보였던 모습처럼
또 다시 세상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죽을 것 같으니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 장군이 더 억울할지
이순신 장군이 더 억울할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 [참고] 다윗의 시편을 묵상합니다 1
- (19화) 오늘 다윗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르다
: '시편 19편' 여호와의 완전한 계시
4)
그때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사람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런 시각에서 다윗보다 이순신 장군이 더 눈물겨운 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다만 각자에게 벌어진 상황을 해석하는
두 분의 삶이 너무도 달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
한쪽은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시는 상황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반드시 살려주실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기대어
하소연하고 매달리고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인다.
6)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조선 왕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국이 정치적 구심점을 이루었을 때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침략이다. 하늘에 대고 왜적을
섬멸해 달라는 제사를 올리지만, 확신은 없다.
더욱이 자신은 간신들의 음모로 반역죄 누명을 입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이미 죽임 당할 운명이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난중일기]
時日三更 舜臣이 跪祝于天曰
(시일삼경 순신 궤축우천왈)
今日固決死하오니 願天必殲此賊
(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이날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이순신이 무릎을 꿇고서 하늘에 비오니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했사오니,
원컨대 하늘이시어,
이 왜적을 반드시 섬멸시켜 주시옵소서.”
7)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
이 환난에서 반드시 살 것을 알았던 사람과
이 전쟁에서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던 사람,
현실을 받아들이는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에
고난에 응전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8)
혹자는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느냐고 묻곤 한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묻고 싶다.
예수님만이 구원이라는 말에 빈틈을 찾고 싶은가?
아니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만이 구원이다
라는 말보다 더 크신 분 같아서 그런가?
내 경우는 후자다.
9)
이순신 장군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아래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기 바라며,
나는 자신의 시대에서 하늘(하나님)과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시대는 복음이 전파된 사회요,
복음의 시대임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우리가 말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 능력의 핵심은 워딩에 있지 않고
살아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되뇌어 본다.
* (참고) 잘잘법
- 예수님은 안믿었지만 정말 착하게 사시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는요? (김학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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