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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 울림 Oct 25. 2024

담가 놓기

한 동안 담가 놓자 더러운 물도 괜찮으니

i

밥퍼 봉사라고 한 번쯤은 들어봤을 텐데

밥퍼를 일구신 분은 최일도 목사님이다
이분 말씀이 솜씨는 요리에서 나오지만
인품은 설거지에서 나온다고 하셨단
ii
이 얘기에 진심으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아련했던 결혼 초기 기억이 소환되었다
집안일에 관해 이루어진 역할 분담에서
설거지는 자연스레 내 손으로 들어왔다
iii
처음 둘이 지낼 때야 예쁜 식기 몇 개였지
밥 먹고 설거지하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해나가 걷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고
매일 저녁 쌓이는 설거지가 가득이었다
iv
회사 일이 늘어나면서 퇴근도 늦어지고
지친 몸으로 집에 오면 아내도 파김치다
아무리 늦어도 그날 해야만 하는 설거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앙칼져갔다
v
내가 불쌍했는지 밥그릇이 불쌍했는지
아내가 식기세척기 이모님을 모셔왔다
더 이상 힘든 척 화난 척을 할 수 없는 나는
웃는 얼굴로 설거지를 말끔히 해야 했다
vi
하지만 아내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음식이 눌어붙으면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식기세척기를 쓰기 전 신경 써야 하는 건
식기들을 물에 담가 놓고 불리는 일이다
vii
마음이라는 접시 위에 올려놓은 음식이
어쩌다 보니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
무작정 식기세척기에 밀어 넣으려 말고
한 동안 담가 놓자 더러운 물도 괜찮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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