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프로방스(Provence) 지역에 있다. 도심을 지나가다 보면 L’Occitane(록시땅)을 유독 많이 만나는데, 한국에서도 워낙 쉽게 접할 수 있는지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다. 그러다 문득 아! Occitane(옥시땅)! 프로방스 지역이 속해있는 주의 이름에 프랑스어의 정관사의 축약형인 L’이 붙은 명칭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프로방스는 남프랑스의 지역 이름이자 비단 화장품뿐 아니라 문학과 미술, 심지어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목가적인 스타일을 지향하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하나의 브랜드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프로방스를 사랑해왔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에너지와 영감을 얻고 이를 자신의 예술세계에 담고자 노력한다. 빈센트 고흐도 그 중 한 명이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빈센트 반 고흐>
아를(Arles)은 고흐가 머무르며 많은 그림을 남겼던 도시다. ‘밤의 카페’, ‘아를의 여인’,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등의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그려졌다. 하지만 그가 예술적으로 좌절하고 고뇌하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 예술가의 명과 암이 모두 서린 이 작은 도시를 찾은 방문객들은 그의 발자취를 좇으며 감동하고 그를 기린다.
님(Nîmes)을 떠나 아를에 잠시 들른 날까지도 비가 계속되었다. 추적추적 오는 빗 속에서 여행한다는 건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하지만 걸을수록 운치가 느껴지는 작은 골목들로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걷다 보니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의 배경이 된 곳에 이른다. 주변에도 카페가 많은데 유독 관광객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이 그곳이다. 생전의 고흐는 자신이 이 카페에 이런 영원한 행운을 가져다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어느덧 오늘 방문하고자 했던 고흐 재단(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에 도착했다. 사실 고흐의 작품은 전 세계 최고의 박물관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기에, 정작 아를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수는 많지 않다. (고흐와 고갱이 카페 안주인을 모델로 하여 ‘아를의 여인’을 그리면서 “이 그림들은 루브르에 걸릴 거요.”라 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 되었다. )
작품은 적지만,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실험적인 전시가 열린다. 오히려 아이들도 재미있고 쉽게 즐길 수 있어서 전시 방문이 아깝지 않았다. 방문한 날엔 Laura Owens라는 미국의 여류화가의 다양한 작품들도 함께 감상했다.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흐가 쓴 편지의 사본이었다. 내가 프랑스어를 못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빼곡히 적어 내려 간 글씨들에 자길 이해해주고 대화해주길 바랬던 대 예술가의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중간중간 그러 져 있는 작품의 습작들도 재미있다.
전시회를 나와 가까운 론 강 강변으로 걸어갔다.
밤에도 이 길을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를에 반나절만 머문다는 게 조금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로마시대 경기장인 아레나(Arena) 쪽 길로 걸어가니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처음엔 마치 우리나라 경복궁에서 처럼 전통의상을 빌려 입는 관광객들이 있나 했는데, 은발이 성성한 할머니들 무리와 마차까지 있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전통 결혼식일까? 뭔지 모르는 건 나뿐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교회 앞 광장에 웅성거리며 무슨 이벤트가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새틴으로 만들어진 색색의 드레스에 새하얀 에이프런을 두르고, 보닛을 쓴 여성들이 마치 고흐의 그림 안에서 바로 튀어나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 아를의 여인의 실사판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며 교회 안으로 전통옷을 입은 사람들이 입장하는 것까지 보았건만, 어서 차로 돌아가자는 동행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7월에 열린다는 아를 전통 축제(Les Fêtes d'Arles)의 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함께 사진도 스스럼없이 찍어준다고 하는데, 수줍게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싶다.
이곳을 떠나려고 하니 한껏 찌푸렸던 하늘이 점점 인상을 펴고 있었다. 차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들꽃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비 온 후 말개진 얼굴로 비추는 태양 아래 펼쳐진 들판 위에, 끝이 뾰족한 사이프러스 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우린 어느덧 프로방스의 한가운데로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