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지상주의 사회속 엄마의 품과 불안한 독립에의 의지
사람들은 흔히 청춘이라고 불리는 젊은 시절을 "낭만적인" 시기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합니다. 그때는 그 시기가 소중한지 미처 몰랐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낭만적"이라는 얼핏 달콤하고 몽환적인 아련한 느낌을 주는 단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더구나 금전적으로는 넉넉지 않았던 시기였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일찌감치 제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젊은이도 있겠고 예전과는 달리 등록금이나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이나 카페 등에서 저임금을 받으면서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세테가 되기도 했는데 그래도 지나가 버린 젊은 날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면서 그리운 이유는 삶에 대한 꿈이 완전히 꺾이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어서 이리저리 이해관계를 칼 같이 재어가며 제 이익을 챙기는 데만 몰두하는 인간관계에서도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비단 한극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경쟁"이라는 말 앞에 "무한"이라는 말이 따라붙어야 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입각한 한국사회는 마치 진화론의 "적자생존" 이론처럼 심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와 한번 도태되면 다시 일어서기가 엄청나게 힘든 자로 나뉘는 경쟁 지상주의 국가가 되어 버렸는데 이런 현상에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규범이 더해져서 한국사회는 자유로운 경쟁이 아니라 가파른 서열화에 따라서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 없이 따라 해야 하는 기형적인 유교 자본주의 사회로 고착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초에 한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던 푸른 눈의 히딩크 감독에 의해 포착된 바 있는데 그는 국가대표팀을 구성하는 선수들이 선후배 관계 때문에 정작 자기가 충분히 슛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선배에게 슛할 기회를 넘겨주기 위해서 자신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이런 유교적 서열 질서가 존속하는 한 한국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고착화되어 무의식적으로 당연시되었던 이 유교적 관행을 깨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은 후배 선수가 선배 선수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팀이 준결승전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일으켰지만 마치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듯이 한국인의 정신(mentality) 속에 깊이 각인된 장유유서 규범은 여전히 세를 잃지 않고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이득은 취하고 손실은 피한다는 행동주의 규칙을 들 수 있는데 그 누구도 윗사람에게 밉보이거나 찍혀서 삶이 고달파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윗선에 잘 보여서 앞날이 순탄해지는 것을 원칙적으로 마다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탄 돌리기처럼 문제가,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는 경우입니다. 결국 꼬리 자르기처럼 토 달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기계적으로 일했던 부하 직원이 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옷을 벗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그 책임을 지시를 내린 윗선이 오롯이 져야 하는 경우도 생길 텐데 제 눈에는 지시를 내리는 윗선이나 고분고분 그 일방적인 지시를 따르는 부하 직원이나 "설마 큰 일이야 나겠어?" 하는 요행수를 바라면서 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현상은 별 구속력도 없는 종이호랑이 같은 법규 탓이기도 하지만 한국사회 전반에 음습하게 깔려있는 장유유서라는 엄격한 유교적 관행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관행은 당연히(?) 서열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밝혀 말할 수 있는 토론 문화를 심하게 가로막아서 설사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입이 간질거리더라도 우선 머릿속으로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사람들, 특히 윗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부터 세심하게 가늠해 보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생각이 기 막힐 정도로 좋아 보여도 윗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으로 예상되면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윗선에 밉보이는 것은 모면했을지 몰라도 그 속이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아서 때론 윗선의 비합리적인 결정과 부당한 지시에 몹시 반발하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학점을 받아야 인생이 술술 플릴 것으로 기대하는 요즘 세태를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대학생일 때는 술 한잔을 같이 하면서 서로 비슷한 고민을 나누거나 비슷한 불만을 토로할 수 있었던 친구 몇 명이 있었지만 직장 등의 사회에서는 내가 입 밖으로 꺼낸 불만이나 불평이 나도 모르게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와서 결국은 내가 다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나와 비슷한 불만이나 불평을 가자고 있어 보이는 직장 동료에게도 섣불리 내 속을 드러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전히 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속내를 어느 정도 솔직히 내비칠 수 있었고 장유유서 관행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에 반하는 민주적 가치도 함께 있어서 선배들에게 자기주장을 할 기회가 있었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대학 때 가깝게 지냈던 몇 명의 친구들도 사정이 딱하긴 마찬가지여서 장유유서 규범이 판을 치는 고단한 직장 생활 때문에 대학생일 때처럼 자주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마음속 깊은 얘기에 전처럼 귀 기울여 들어줄만한 정신적 여유도 없고 그동안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심각한 얘기를 듣는 것을 꺼려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만나더라도 속 얘기가 아니라 겉으로 도는 얘기, 이를테면 잘 나가는 연예인 뒷얘기 같은 얘기를 하면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간신히 모면할 수도 있습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분리 불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아릴 적에, 그러니까 부모, 특히 엄마의 보호와 돌봄이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을 가리킵니다. 어떤 티브이 육아 프로그램에서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게 됐을 때처럼 물리적으로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심한 공포감을 느끼는 어린아이들의 사례도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 아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어린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져도 별 탈 없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생활하는 다른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왜 그토록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어쩌면 그에 대한 대답은 "품 안의 자식"이라는 표현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분리 불안과 짙은 외로움 간에는 어떤 긴밀한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