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안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아빠보다 엄마가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반대하시는 분이 계실진 모르지만 모성애란 어린 자녀, 즉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어린 자녀를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자연이 여성에게 부여한 자연스러운 성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빠의 사랑을 일컬어 "부성애"라고 하지만 자녀를 품에 안고 보호하려는 모성애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을 하나 빌자면 남성에게는 남성성(Animus)과 함께 여성성(Anima)이 존재하고 여성에게는 여성성(Anima)과 함께 남성성(Animus)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어느 성질이 우세한지 그래서 어느 성질이 더 도드라지는가라는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이 구분됩니다. 이 두 가지 성질은 선천적인 성질의 것이지만 주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그리고 그 외부환경이나 조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원형질적 성질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나타납니다. 물론 겉으로 볼 때는 여전히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분간할 수 있지만 그 또는 그녀가 풍기는 남성적인 느낌이나 여성적인 느낌은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6,70년대 유행했던 "빨간 마후라" 같은 예전 영화에서는 여성을 사로잡는 강한 남성성이 강조되었는데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때는 남성 중심주의적 유교 질서의 영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었기 때문에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남자는 태어날 때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두 번을 제외하곤 울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곤 해서 그 당시 남자로 태어난 것이 사회적 특권이자 엄청난 심적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를 번듯하고 자랑스러운 남자로 만들기 위해서 강하게 카운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남자 새끼가 그렇게 약해서 이다음에 뭐 될래?"하고 윽박질러서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로 하여금 주눅부터 들게 하고 부모님 그늘 아래서 기 한번 제대로 못 핀 채 "남성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세뇌를 은연중에 받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남자아이들은 어떤 모습과 표현이 외부에 강한 남성으로 비칠지는 그 당시 드라마나 영화 속의 "강한 남성"을 통해 배웠고 필요할 때면 요즘 표현으로 코스프레하듯이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그럴수록 자기 내면 속의 불안하고 겁 나고 무서워하는 모습은 좀처럼 드러낼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코스프레를 할 때 혹시 누가 내 다른 진짜 모습을 알아채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몹시 긴장했을 것이고 그런 코스프레가 끝나고 나면 달콤한 사탕과 과자를 그 대가로 받을 수는 있었지만 혼자 있는 밤 시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하면서 낯빛이 몹시 어두워진 채로 잠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6,70년대를 풍미했던 " 강한 남성상"에 대한 동경은 어느새 여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자상하면서 강한 남성으로 바뀌었다가 IMF 직격탄을 맞은 뒤에는 경제력이 확실한 강한 남성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경제력은 약방의 감초처럼 언제나 빠질 수 없는 강한 남성성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이긴 했지만 말이지요. IMF가 더 심화시킨 측면이 있겠지만 그런 추세는 점점 더 심각해져서 남편은 밖에서 돈 벌어 오는 기계쯤으로만 여기게 돼서 가정은 남자가 씻고 밥 먹고 자는 여관 같은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유령과도 같이 다른 가족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대해서 가족이랑 같은 식탁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며 저녁밥을 먹은 때가 언제인지 가물거릴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 된 남자들도 적지 않을 테고 말이지요.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가 경쟁 지상주의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관습의 잔재인 서열 문화로 사람을 판단하는 분위기 때문에 부당하게 비교당하면서 차별과 멸시 그리고 "너는 우리 클래스가 아니야" 하며 조롱하고 배제하는 관습이 옷만 바꿔 입고 다시 등장해서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말처럼 조롱과 멸시와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 돈 하며 아득바득 돈을 더 많이 소유하려 해야 한다는 요상한 주술이 많은 한국사람들의 정신을 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요상한 주술은 아빠만이 아니라 엄마들의 정신도 홀려서 "내 자식이 남들로부터 우습게 여겨지는 것을 넘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잣이라도 할 거야. 근데 방법은 단 하나; 죽어라 학원 보내고 옆에 붙어서 딴짓 못하게 하면서 공부만 시켜야 돼. 뭐, 놀고 즐기는 거야 성공한 뒤 나중에 해도 되잖아. 지금 좀 못 논다고 큰 일 나나? 게다가 남의 아이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쥐뿔도 없는 놈이 무슨 프라이버시? 누가 나 잘 되자고 하는 건가? 다 저 잘 돠라고 하는 건데. 지금 놀다가 대학도 변변치 못한 데 들어가면 그다음은 보지 않아도 부처님 손바닥이야. 그리고 나중에는 나 보고 왜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굴면서 날 학원에 보내지 않은 거야 하면서 내 탓을 할게 뻔해. 그러니 그런 어이없는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찌감찌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게 해야 돼. 내가 지금껏 살아보니 엄마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쯤은 터득했거든"하며 어지럽고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토닥여 가며 부흥회에 참석한 열성 신도처럼 아이의 열공과 좋은 성적만이 구원이라고 철석같이 믿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술은 공포, 그것도 신생아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울어 버리는 것처럼 쉽게 전염되는 앞날애 대한 공포를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란 표현처럼 또는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사라지거나 자꾸만 뒤로 물러서는 무지개처럼 이 공포는 항상 아직 오지 않은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기 때문에 아무리 다가가서 쉬고 싶어도 영원한 채찍질처럼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고 좀 더 좀 더 하는 식으로 고문을 합니다. 그건 마치 제가 언젠가 신문의 뉴스를 통해 접한 어처구니없는 사례로 카지노에서 대박을 터뜨리기를 기대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인 300억 원을 다 쏟아붓고 결국 거지 신세가 되어서 잠잘 숙소인 여관비조차 없게 된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허망한 욕심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런 주술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성질도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의식적으로는 또는 말로는 반박하기 힘들지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막연하지만 또렷한 불안감과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잘 종 잡을 수 없는 답답한 분노를 자꾸만 불쑥불쑥 일으켜서 때로는 사람의 정신을 녹초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주술은 물질적인 보상과 함께 두려움도 그 수단으로 쓰는데 요즘처럼 언제 모가지가 잘릴지 알 수 없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는 시기에는 "까딱 잘못하면 나도 저 꼴이 되겠구나"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기기도 하는데 이 말은 엄마들이 "그렇게 살다가는 이다음에"로 시작되는 은근하고 암시적인 협박성 말과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가며 "그랬다간 저렇게 된다"는 말 앞에서 더럭 겁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광경을 눈으로 보게 하면 보는 어린아이들은 "나도 저렇게 되기는 싫어. 아니, 저렇게 될까 봐 무서워"하는 마음 때문에 막연히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저렇게 되지 않겠구나"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생각을 세뇌받게 될 텐데 경영학의 용어로 이 현상을 표현하자면 일종의 "공포 마케팅"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 두려운 주술에 걸린 아이는 오로지 공부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그래서 아이의 앞날에 대한 막연하지만 보편적인 두려움을 가진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안심시킨 대가로 왕자님 공주님 대접을 받게 되어서 그 결과 엄마는 몸종처럼 갖가지 아이들의 수발을 바로 옆에서 들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 나 지금 공부 중이거든"이란 말을 하면 엄마는 굽신거리는 하인처럼 혹시라도 아이의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는지 잘 살피면서 미리미리 알아서 아이의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알아서 없애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집단적으로 감염되어서 "정상적"이라고 판단하는 착시 현상 때문에 아이가 이런저런 경험들을 거치면서 때론 낙담도 하고 실망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연히 마주친 소박한 기쁨이나 조용한 즐거움도 느껴 가며 인간의 삶이란 뜻을 지닌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조금씩 배우면서 어른으로 크는 가능성들을 의도치 않게 아이에게서 거의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설사 추상적으로는 "내 아이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키울 거야"라는 목표를 가진 엄마들도 앞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의도치 않게 원치 않는 실수와 시행착오를 연거푸 해 가며 차츰차츰 익혀야 하는 자율성을 키울 기회를 아이에게서 빼앗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원치 않게 겪게 되는 부정적인 경험들로 인해 아물기는 했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인간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동시에 타인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넓어진 어른으로 차츰차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으면서 자녀를 계속 엄마 품 안에 가두어 마냥 보호하려 드는 태도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