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를 발견한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을 아루거나 발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그 일과 관련된 축적된 과거의 지식을 바탕 삼아서 그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킬 텐데 이때 가능성이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일이나 목적이 현재 얼마나 가능한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도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가능성부터 점쳐 보는데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가능성은 모호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늘 위험을 포함하고 있고 그 위험은 물질적인 손해뿐만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손해도 뜻합니다. 게다가 제가 고등학생일 때 배운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의 제목처럼 이제 고작 첫걸음을 뗄 뿐인 순간에는 그 상황이 너무 막막하고 불안해서 떼었던 발걸음을 계속 앞으로 옮기지 못한 채 망설이면서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선천적인 능력과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내면에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와 그동안의 경험의 한계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100%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상한 과대망상증, 즉 "내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배자가 되겠다"는 엄청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많은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 한 히틀러 같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실패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인과론적 법칙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개인적이기도 하고 어떨 땐 사회적이기도 한 문제들과 종종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존재여서 싫든 좋든 그 문제를 (어느 정도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문제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화두가 되어버린 대학입시나 취업 같은 절박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는 비단 그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인데 아직 어린이집에 갈 나이도 안 된 어리디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한국의 식문화에 따라서 젓가락질을 배우도록 합니다. 저도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제는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지만 처음에는 원치 않게 자꾸만 반찬을 흘리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 전용 젓가락이 생겨서 젓가락질에 몹시 서툰 아이들이 반찬을 덜 흘리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이상한 부모가 아니라면 젓가락질에 서툴러서 자꾸만 젓가락으로 집은 반찬이 흘러내린다고 아이를 야단칠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아이가 젓가락질에 가급적이면 빨리 적응해서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어린아이들의 젓가락질에 대해 갈게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어떤 원하는 결과를 이루려면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점과 함께 설혹 급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은 뒤 부모, 특히 엄마가 대신 먹여주면 일견 그게 아이에게 편할지 몰라도 그 대신 아이는 실수와 시행착오 같은 "불쾌한" 경험을 바탕으로 젓가락질을 배울 기회를 빼앗기고 엄마가 더 이상 일일이 옆에서 알아서 챙겨줄 수 없는 시기가 되면 그 아이는 자신의 서툴디 서툰 능력 때문에 몹시 당황하면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옆에서 일일이 간섭하고 알아서 챙겨준 엄마를 몹시 원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혀 말했지만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운명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어서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느라 노심초사할 팔요는 전혀 없겠지만 그 대가로 사람의 삶은 완전히 절망적이거나 반대로 아무런 호기심도 아무런 기대도 없는 지루하고 무료한 삶의 연속이라서 심드렁하게 살 수밖에 없을 텐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모든 정보가 미리 입력되어 있어서 감정도 욕구도 필요치 않은 컴퓨터 같은 기계적이고 "운명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운명처럼 정해진 삶의 조건들은 무시해도 되냐?"라고 말이지요. 이를테면 완고한 아버지 그리고 제 자녀를 폭군처럼 구는 아버지로부터 보호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우울한 어머니, 게다가 남들 다 시키는 여러 개의 학원에 보내기 힘든 가정 형편 그리고 "재주가 메주"라는 표현처럼 달달 외워서 시험 보기 위한 학습에는 관심도 능력도 부족해서 고민이 되는 처지 같은 것, 즉 마치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노력해도 기분 나쁜 늪 속에 빠진 듯이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은 운명처럼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를 쓰러뜨리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다른 것들도 주르륵 무너지게 하는 도미노 현상처럼 또는 한때 유행하던 표현을 쓰자면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다음 단추들도 잘못 꿰게 된다"는 표현처럼 어떤 사건이 나머지 삶의 모습들을 결정짓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에 떨게 만드는 상황이나 조건에 맞닥뜨렸을 때 마치 운명의 노예처럼 그저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과거의 이런저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현재 나에게 허락된 가능한 선택지들이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고 저울질해 보고 그중 제일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려는 자유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잔인한 운명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보는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 그 문제로 인해 자신 안에 생긴 불안을 애써 견디면서 임시변통적이거나 그저 부분적이어서 성에 차지 않는 작은 해결책이라도 이리저리 찾아보려는 의지에 바탕을 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몹시 불평등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말이지요. 이때 중요하고 본질적이기도 한 것은 그런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한 불평등 속에서 당연히 생기는 마음속 불안을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으려는, 힘만 몹시 들뿐 가망성이 없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우선 그 불안을 정직하게 인정한 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금 마음속 불안을 즐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겨우 생각해 낸 해결책이 자신 안의 모든 불안을 없애줄 수 없다고 낙담만 할 게 아니라 그 부분적 또는 임시방편적인 해결책으로 이전보다 처한 상황이 개선되었다면 그때 그 새로운 지점에서 앞을 바라볼 때 또 어떤 새롭고 나은 해결책이 눈앞에 보이는지를 눈여겨보면서 다시 앞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야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