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에 "내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고 말하는 그대여"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마 한창 열애 중인 남자 친구가 한 그런 말을 들은 젊은 여자는 그. 말에 감격하면서 "내일은 사랑한다 말해줄 거야"라고 화답합니다. 제 버릇이겠지만 저는 영화든 드라마든 또는 대중가요든 해피엔딩으로 끝날 때 "그럼 그 뒤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하고 혼자 질문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해피엔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 해피엔딩이 "평범한" 일상을 가려 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많은 사람들이 소란하고 흥겨웠던 축제가 끝나면 어둠이 내린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 뒤 내일의 평범한 일상을 다시 살기 위해 고단해진 몸을 침대에 눕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서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축제를 즐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 말로 그런 것들이 다 쓸데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돛에 바람을 싣고 떠난 배가 잠시 어느 외딴섬에 정박을 하고서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음료수를 먹고 마시면서 그간의 오랜 항해에서 비롯된 피곤함과 고단함을 달래면서 그 달콤한 휴식으로 잠시 항해의 고단함을 잊더라도 그 휴식이 끝나면 다시 항해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어서입니다. 이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판단하셔야겠지만 저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모습이 돛을 달고 바다로 떠난 배가 가끔 외딴섬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돛을 올리고 항해를 계속하는 것과 많이 닮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떠들썩하고 화려한 젊음을 섭섭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면서 젊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술도 마시고 클럽에 가서 열정적인 춤도 추고 미주알고주알 속 이야기도 나누었던 젊은 시절 친구들이 자신의 생계와 삶을 책임지기 위해 직장을 가지고 결혼해서 자녀를 두면서 점차 연락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런 단조로운 삶의 모습에는 이번 달 전기료가 지난달보다 훨씬 많이 나와서 "도대체 가족 중에 누가 이번 달에 쓸데없이 전기를 많이 쓴 거야?" 하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오거나 남의 아이들은 이맘때쯤이면 말문이 트인다던데 우라 애는 왜 아직도 말을 떼지 못하는 거지?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남편이나 아내와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운 뒤 어느 연속극에서 본 대로 거실 불은 꺼 놓고 식탁 위의 불만 켜 놓은 채 안주로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씹어 먹으면서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도대체 나 뭐하러 결혼해서 애까지 낳고 살지? 이러려고 그 힘든 공부를 그렇게도 모질게 오랫동안 했나? 도대체 사는 게 뭐지?" 하다가 종래에는 도대체 "삶의 의미가 뭐지?"라는 철학적 물음으로 빠지는 모습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 늦은 시간 마른 멸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혼자서 소주를 홀짝이는 게 왠지 분위기 있다고 느껴서 그만 기분이 신파조로 변했더라도 문득 "누가 내 옆에서 내 마음속 깊은 얘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들어주면 좋겠어. 그게 단 한 사람뿐일지라도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자기 자신도 제대로 추스를 수 없는 정체 모를 외로움이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날 전신주 같은 기둥에 붙은 영화 광고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제목은 "einsam, zweisam, dreisam"이었습니다. einsam이란 단어는 "외롭다"는 뜻을 가진 독일어 형용사인데 이 영화 제목을 조금 의역해서 번역하자면 "혼자 있어도 외롭고 둘이 있어도 외롭고 셋이 있어도 외롭다" 정도일 텐데 포스터가 우울한 분위기이기는커녕 아마도 코미디 영화인가 보다라고 짐작할 정도로 밝았지먼 그 제목은 한참 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제가 젊은 시절에 접했던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당시에는 절감할 수 없었지만 그때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질환이 있는데 그중에는 공포증도 있습니다. 이 공포증은 다시 여러 가지 공포증으로 나뉘는데 그중에 "광장 공포증"이란 것도 있습니다. 한국, 그것도 서울에 사는 한국사람에게 광장이란 단어는 주로 "광화문 광장"을 연상시키겠지만 저는 광장이 어떤 모습과 분위기를 가졌는지 독일에 가서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쓰이는 "광장"이란 표현이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제가 독일에서 경험한 광장의 모습에 국한해서 말씀드리자면 광장은 상점이나 백화점 그리고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 등으로 들러 쌓인 탁 트인 넓은 장소인데 서울처럼 상점들이 어디 할 것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장을 보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굳이 먼 걸음을 할 필요가 없는 한국과는 달리 독일은 상점들과 백화점들 그리고 카페 등이 시내 중심가에 모여 있어서 쇼핑을 하거나 산책을 하다가 차 한잔을 마시러 나온 적지 않은 사람들을 시내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데 사람들로 몹시 북적거리고 손님의 발길을 잡아끌기 위해 음악을 요란하게 틀어놓는 상점들이 즐비한 명동과는 달리 독일 대도시의 광장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좀 한적해서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롭고 경쾌한 느낌마저 주는 넓은 광장, 그것도 사람들이 쇼윈도를 보면서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는 광장에 가면 심한 불안이 몰려와서 갑작스러운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대체 어떨까요? 저도 오랫동안 그런 광장 공포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았을 뿐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제게 광장이란 볕 좋은 일요일 오후에 같이 공부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쇼윈도에 전시해 놓은 꽤나 값이 나가는 상품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면서 산책을 하다가 조용한 카페에 들러서 함께 커피나 시원한 주스를 마시면서 달콤한 휴식을 즐기는 기분 좋은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