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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들며 -1과 1을 들여다볼 때

chapter02. 조소 수업 시간 스님의 질문



 올해는 취준생으로서 기량을 쌓는 데 매우 중요한 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과 집중으로 냉정 해지는 때도 있었던 거 같다.


길을 걷다 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이 지구 상에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뭔가 나 자신을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게 되면서도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역할에 대해 많이 질문하고 그러고 길을 걷게 되는 거 같다.


최근 학원에서 듣는 수업이 있다. 

조소와 VFX(영화나 그래픽 디자인을 위한 CG 기법을 아우르는 기법) 수업을 듣는데, 조소 수업 시간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발생한다.


유토로 빚고 깎으면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가는 시간, 


나의 옆에는 스님이 계신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 옆에 종교 종사자가 계신다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스님께서는 특히나 '정확성'을 강조하시는 분 같았다.

여기 독자 중 어릴 적 찰흙으로 사람을 만들어보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거다.

'창조'엔 완벽이 없고

'찰흙'은 특히나 정확할 수 없다.


만지고 다듬는 거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정확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아니라

최대한 비율과 근육의 돌아가는 방향에 맞추어하고 있었는데,


나의 옆자리 스님께서는 다소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시는 거 같았다.


그러다 스님은 질문을 던진다.


" 선생님, 이게 조소라는 게 깎고 붙이고 하는 건데, 뺐다가 더 하는 건데 이게 사람의 형태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인가요?"



옆에서 질문을 들은 나는 

매우 흥미로운 토론이 시작될 거 같다 나의 유토를 빚으며 귀 기울이며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이 다소 난해한 부분일 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소의 정의에 있습니다. 
'조소'란 조각과 소조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스님, 이 하나 중 하나만 더 많이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형태는 나오지 않습니다.
깎기만 한다면 형태의 존재감은 점점 없어질 것이고
쌓기만 한다면 그 형태의 실체는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니까요.


선생님의 말씀에 이어서 스님께서는 또 추가 질문을 하셨지만

나는 이 대답을 듣자마자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며 잠시 세상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은 -1과 1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도 조소가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싶었다.

깎는 것은 -1 , 쌓는 것을 1이라 한다면 말이다.


이 세상에 -1과 1로, 깎는 것과 쌓는 것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은 거 같다.


소비와 소유

밀물과 썰물

삶과 죽음

해와 달

동과 서

사랑과 이별

남과 여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소'라는 개념과 같이 이 세상은 -1과 1의 조화, 깎는 것과 쌓는 것의 조화가 있어야 살아 있는 거 같다.


소비만 할 때 우리는 소유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소유를 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현대인들의 방법이다.


밀물만 있다면 이 바다의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고 있을 수 없다. 썰물이 있어야 바다 생물의 균형과 그 바다 옆에서 사는 인류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삶만 있다면 영생일 것이며, 그 영생의 연속이 과연 해맑은 순간들인 것일까. 죽음이 있기에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려 하는 것을 아닐까.


해는 떠올라야 달이 다음에 떠오를 수 있다. 달이 없다면 해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비추며 서로의 자리로 끌어당길 수 없을 것이니. 이 세상에 하루가 사라질 것이다.


동양과 서양으로 세상을 구분 지어야 할 때, 수없이 많은 차별과 경계선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동 서양의 융합이 우리의 인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인류가 아닐까.


사랑을 하는 그 순간을 뜨겁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사랑은 끝나버릴 수 있다. 육체의 이별, 정신의 이별, 그 둘의 이별이든. 그렇지 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사랑을 선택한다. 이별이 올 수 있다는 그 사실임에도 품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남과 여로 구분하는 시작은 오래전부터였다. 남성 중심, 여성 중심, 남자 여자 갈등은 한국에서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단연코 주장한다. 남과 여의 갈등이 존재하기에 조화도 따라오는 법. 또한 이 세상에는 가면 갈수록 남자와 여자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이들도 더욱더 생겨날 것이다. 이 또한 남과 여의 조합과 균형에 대해 우리는 다시 정의하며 서로를 인정하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 형상 유토를 다듬으며

스님과 선생님은 조소에 대한 많은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그 담소를 경청하는 나는 사람을 만들며

세상에 대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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