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우리 썰매 타러 갈까?

2020년 마지막날, 산에 오르다

by 라미루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집 근처 관악산에 오릅니다.

코로나의 광풍이 휩쓴 올해처럼

몸과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때, 이미 곁을 떠난 아버지의 듬직한 어깨를 닮은

이 산이 없었으면 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등산로 초입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알림판이 보입니다.

내일 관악산 정상, 연주대의 해맞이 모임은 코로나로 인해 '금지'라고 합니다.

시간도 명시되어 있네요.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아마 다른 해돋이 명소의 모임도 일부 제한하지 않을까 싶은데, 혹시나 새해 이른 아침부터 작심하고 일출을 맞이하려는 분들은 사전에 출입 제한 여부를 확인 바랍니다.


오르막길에 들어서니 마스크를 쓴 채 달리기를 하는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보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24시간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거리두기를 하며 맘 편히 달릴 수 있는 곳이 곁에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자신의 체력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다양한 루트로 오가며 매일 매 순간 달라지는 산세와 풍경을 접할 수 있답니다.


등산로 왼편을 따라 길게 타고 내려온 계곡물은 꽁꽁 얼어붙어 어른 두엇이 그 위를 밟아도 끄떡없습니다.

저 위에서,

아이들 몇몇이 플라스틱 썰매를 타고 놀고 있군요.

가까이 다가가니 어떤 아이들은 한쪽 발목에 터질 듯이 부푼 풍선을 하나씩 매달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학교 운동회에서 접할 법한 '풍선 터뜨리기' 놀이를 여기서 보네요.

미끄러운 얼음판에서 친구들의 풍선을 밟으려다 제 풀에 넘어지는 아이를 두고 한바탕 터지는 웃음소리.

"빠앙!"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의 발에 묶인 풍선이 친구들의 발 망치를 견디다 못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근처를 지나는 등산객들이 웬일인가 싶어 이쪽을 쳐다봅니다.

아이들끼리 놀러 온 건가? 곁에 아빠가 있을 법도 한데..

저기 구석에 두꺼운 점퍼와 털모자를 덮어쓴 네댓 살 또래의 아이를 태운 썰매를 끄는 사람이 보입니다.

줄을 잡고 아이가 가리키는 대로 지그재그로 썰매를 끄는 사람은 롱 파카를 걸친 겉모습만 봐서는 아빠인지 엄마인지 할아버지인지 통 분간이 가질 않네요.

다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빨갛게 부어오른 콧잔등 위에 걸친 안경알이 부예져 손가락으로 대충 닦아냅니다. 인중 사이에 고인 말간 콧물이 말라붙어 얼어붙을 지경이지요. 숨이 차오르는지 턱에 걸친 마스크를 올릴 엄두도 못 냅니다.

오늘 같은 날, 이왕이면 새해 첫날에 작심하여 움직이겠다고. 코로나를 핑계로 집에서 편히 누워 쉬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을 텐데,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집 밖으로 나와 고생하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목놓아 부릅니다.

"아빠, 나도 썰매 끌어 줘."

"배고파, 아빠."

"아빠, 장갑이 자꾸 벗겨지는데.."

아빠라 부르는 아이가 셋입니다.

"아저씨, 이거 풍선 꼬랑지 좀 묶어 주세요."

"우리 좀 더 놀면 안 돼요? XX 아빠."

나머지 아이 서넛은 그를 아저씨 또는 누구누구 아빠라 부르네요.


부옇게 흐려진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며 코를 훌쩍이는 그가 끌던 썰매를 멈추자 그 위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아빠, 얼른 가. 멈추지 말고.."

"잠깐 숨 좀 돌리고.."

멀리 푸르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는 아빠의 구부정하게 접힌 허리가 그제야 곧게 펴집니다.

넓은 빙판을 서너 바퀴는 돌았는지 머리 끝에 솟구치는 열기를 식히려, 파카에 달린 모자를 뒤로 벗자 가운데가 휑하게 빈 그의 정수리가 드러납니다.

허연 입김을 내뿜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파이팅, 힘내세요!'라는 마음이 담긴 어색한 눈인사를 보내고는 발걸음을 돌렸네요.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아 책을 읽는 솔과 연, 두 아이에게

"우리도 관악산 계곡으로 썰매 타러 갈까?"

하고 묻자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이내 좋다고 합니다.

다만, 아내는 매섭게 추운 날씨와 코로나가 활개를 치는 이런 시국에 무슨 썰매냐며 질색을 하네요.

내년에 기회가 되면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이 녹아 저 아래로 흐르기 전에

집 어딘가에 숨겨진 썰매를 꺼내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올라야겠습니다.



***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얼마 남지 않은 2020년 마무리 잘하시고,

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하게,

대박 터지는 한 해를 보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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