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밖에 눈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눈은 한결같더라

by 라미루이

늦은 저녁을 먹고 해가 떨어진 지 한참이 지나서야

산에 오르려 밖에 나오니

온 세상이 슈가파우더가 듬뿍 뿌려진 슈톨렌 빵처럼

온통 하얗게 변했다.

오가는 차들도 뜸하고 어쩌다 지나가는 차들도 조심조심

속도를 줄이는 바람에 사방이 고요하기만 하다.

눈이 내리면 지상에 깔리는 잡다한 소음을 잡아먹는다던데 정말인가 보다.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자국 또한

평소보다 천천히, 깊이 눈밭에 새겨진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미끄러울지 몰라 팔자걸음으로 종종거리며 내려오니

마주 오던 장초를 입에 꼬나문 아저씨,

밤하늘을 치켜보며 원망 섞인 한마디 날린다.

"눈 한번 징하게도 쏟아지네. 하늘은 속 편한가 보네잉."

매캐한 담배 연기가 코끝을 자극하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관악산 초입에 들어서니 코트 자락에 눈이 제법 쌓일 정도로 만만치 않은 눈이 내린다.

희부연 하늘을 올려다보니 활짝 열린 두 눈동자로 모여드는 눈송이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기가 어려워 자꾸 고개가 수그러진다.

호압사로 올라가는 길목의 얼어붙은 물레방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누군가 갈피를 못 잡고 요리조리 꺾어지는 밑창 무늬를 반대로 따라가다 곧 그것이 나 자신의 발자국임을 깨닫는다. 제정신으로 산에 올랐음에도 거나하게 술 취한 자처럼 이리저리 헤매는 꼴이라니.

혹여 내 발자국을 가이드 삼아 따라 오르는 산객이 있다면 지그재그 스텝을 밟다가,

하마터면 미끄덩 넘어질 뻔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깨끗한 눈밭에 첫 발을 디딜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내리는 눈이 드문드문하다. 하지만 짧은 호흡으로 그칠 눈은 아니다.

숨을 고르다가 내일까지 하늘의 양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덜어내듯 쏟아질 눈이 산더미이다.

현관에 들어와 잘 준비를 마친 솔과 연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얘들아, 밖에 눈 엄청 내렸거든."

"우와! 신난다."

말꼬리를 맺기도 전에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아이들.

콧등이 닿을 것처럼 바짝 다가서는 바람에 투명한 외창에 동그란 김이 서렸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아빠, 우리 산에 또 놀러 가는 거지?"

"저번처럼 계곡에 가서 썰매 타고 눈싸움도 하고, 막 자빠져도 되는 거지?"

"그래, 눈이 그치면 날씨 봐서 놀러 가자."

"크크크, 이번엔 눈사람 가족 만들어야지. 엄마랑 아빠랑 그리고.."

"언니야. 엄마 눈사람은 내가 만들건데."

"엄마는 내 차지거든. 넌 아빠 만들면 되잖아."

"쳇, 싫은데."

불퉁하게 튀어나온 연의 입술이 도드라진다.

"자꾸 그렇게 싸우면 눈사람 안 만들 거야. 둘이서 엄마랑 아빠 눈사람 다 만들면 되지. 안 그래?

아빠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그제야 표정이 밝아진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간다.

"눈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밤새도록."

"내 키만큼 쏟아지면 한데 모아서 동굴을 깊이 팔 거야. 거기 들어가 우리 둘이 누우면 재미있겠지."

"으흥, 그 안에 엄마랑 아빠 눈사람 들여놓으면 되겠네. 언니야."

"어서 자라. 시간이 늦었다. 푹 자야 내일 눈 그치면 놀러 가고 그런다."

"네, 아빠!"

아이들 방의 불이 꺼졌지만 두런두런 속삭이는 자매의 들뜬 수다는 좀체 끊어질 줄 모른다.



***

저렇게 눈을 동경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흘러

이른 아침에 등교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나이에 이르면

다음 날 길이 질척인다고, 빙판길이 미끄러워 짜증 난다고, 평소보다 미어터지는 지옥철에 부대끼느라 지각한다고 온갖 불평을 늘어놓겠지.

혹시나 그렇더라도 저렇게 예쁘게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해.

아빠가 어릴 때부터 눈은 한결같았으니.

세상의 과다한 잡음을 소거하고, 순백을 닮은 깨끗함을 지닌 저 눈은

이른 새벽부터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에 녹았다가 영하의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붙은 것뿐이니.

다만 그 위를 밟고 뭉개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매연이 뒤섞인 타이어 자국과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흙먼지 뒤엉킨 구둣발에 더럽혀지는 것뿐이니.

너희들의 맑은 두 눈동자에 비치는,

하늘에서 막 떨어진 하얀 눈이 지닌 최초의 빛과 모양을 오래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 아빠의 바람은 그것뿐.


아이들의 눈빛을 닮은 눈의 맑은 모양을 뭉개고 더럽히는 건 결국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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