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철벽이 무너지다

2021 US Open 남자 단식 결승을 보고..

by 라미루이





테니스의 신, 무패의 Goat라 불리던 사내

벤치로 물러나 오열하고 있다

땀범벅이 된 얼굴을 덮은 흰 수건이

흠뻑 젖어들고 들썩거릴 정도로..


US Open 결승 전야, 그는 캘린더 그랜드슬램

이라는 52년 만의 위업을 이루는 꿈에 부풀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은퇴 경기에 임하는 것처럼

지금껏 쌓아온 구력, 열정과 투혼에

기나긴 고통과 잠시의 희열로 점철된

백전노장의 모든 것을

촘촘히 얽히고설킨 라켓의 씨날줄에 걸어

일구일타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한창 물오른 젊은 피의 강력한 서브와

여지없이 빈틈을 찌르는 예봉에

허무히 1세트를 내주었다


하늘이 내린 단 한 번의 기회,

2세트 트리플 브레이크 포인트를 거듭 실패하고

치미는 분을 못 이겨 자신의 라켓을 바닥에

패대기쳤을 때, 그는 이미 패배를 예감했으리라

이제야 그는 높다란 정상에 머물러

찬란히 빛나는 저 구름 위가 아닌

까마득한 낭떠러지의 발아래를 내리보고,

레드카펫이 인도하는 휘황한 무대가 아닌

뉘엿한 자신의 그림자 너머를 돌아보았으리라

전성기의 페더러, 나달 그리고 자신을

코트 위에서 마주하는 누군가가 절감했을..

어떠한 공략에도 허점을 보이지 않고

허물어지나 싶을 때, 기어코 다시 세워지는

금강철벽을 대적하는 무력함과 절망감에

치를 떠는 그 심정으로..


그럼에도

관중들은 일방적으로 그를 응원했다

상대가 서브를 올릴 때마다

적막을 깨는 야유와 고함소리가 울리고..

코트에서 잠시 물러난 그는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

구겨진 수건으로 민낯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지도 못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쏟아내는

자신의 꺾이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굽은 등을 다독이는, 코트 사면을 에워싼

수많은 팬들의 기립 박수와 환호에

'노박 조코비치'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화답했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 다시금 물이 차올라

진녹색 코트에 점점이 떨어진다


2021년 US Open,

페더러, 나달과 조코비치

영구히 이어질 것만 같던 견고한 장벽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떠오르는 러시아의 신성, '다닐 메드베데프'

내년 이맘때, 아내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은빛 챔피언 트로피를 연이어 들어 올릴 수 있을지..

'빅 3'는 21회 메이저 우승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따라 지상으로 추락하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


근 20년 동안 같은 장에 머물러 있던

테니스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제 넘어가려 한다






- 조코비치의 메이저 대회 27연승 기록은 이날 패배로 마감했다

- 캘린더 그랜드슬램: 한 해에 열리는 4대 메이저 대회(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Open)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 1969년 로드 레이버 선수가 달성했다.

- 다닐 메드베데프는 2021 US Open에서 우승함으로써, 4대 메이저 대회 파이널에서 '빅 3'를 상대로 승리한 첫 20대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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