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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루이 Mar 12. 2024

그는 등산가, 탐험가이자 문화 인류학자였다

이즈미 세이이치_<머나먼 산들>을 읽고..







이즈미 세이이치는 1927년 부친 이즈미 아키라가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조선으로 이주했다. 

그는 경성공립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경성 근교의 산을 오르면서 등산가, 알피니스트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이어 경성제대 재학 시절, 최초의 대학산악회인 '경성제대 산악회'를 창설하여 왕성한 산악 활동을 펼쳤다. 20세기 초, 조선 북녘의 금강산, 관모봉, 부전고원, 백두산 등정까지 실행하였고, 주위 풍경과 지형, 상세한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수차례 금강산에 오르는 여정을 공들여 설명한다. 장안사의 방갈로에서 머무르다 망군대로 가는 길,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내외금강의 비경,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비로봉에 도달하여 발아래 금강산 전체를 조망하는 벅찬 감정을 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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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른 비로봉 정상에서의 한 시간을 나는 잊어버릴 수 없다. 금강산의 장대함을 통해 산의 굳건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힘과의 관계를 몸이 저릿할 만큼 느꼈다고나 할.. 그런 느낌이었다.





해방 이전 조선에 자리한 주요 봉우리들. 백운대, 인수봉, 만폭동 계곡, 접선봉 등을 오르내리며 남긴 글은 생생하기 그지없다. 이즈미 세이이치는 조선의 명산을 연이어 등정하며 등산가와 인문학자의 꿈을 동시에 키워 나갔다. 남해를 건너 제주도, 만반의 준비 끝에 등정한 한라산에서 뜻밖의 조난을 당한 동료의 사고에 괴로워하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굿거리를 통해 토속 신에게 실종자의 행방을 묻는 제주도의 무속 신앙에 놀라워하면서도,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학문적 폭을 넓혔다. 당시 그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제주도- 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는 당시의 제주도와 도민들의 사회상, 민중 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이즈미 세이이치는 몽골, 대만 등 중앙아시아와 남태평양의 뉴기니, 남미를 방랑하며 등산가에서 탐험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 복무와 아시아의 식민지 탐방을 하면서 일제가 몰락하는 전조를 포착한다. 학계 강연과 기고를 통해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지만, 그의 발언은 무시되고 탄압받기 일쑤였다. 이 책에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가 해방을 맞이한 기록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일본은 이전의 과오를 인정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바람이 일부 행간에 묻어 있다. 



쇠창을 든 뉴기니 섬의 원시 부족들이 밤새 호전적인 춤을 추며 위협하는 가운데 의료 봉사지원을 하고, 떼 지어 날아다니는 박쥐들을 수렵하여 통으로 구워 먹는 파푸아 인들의 식생이 흥미롭다. 페루에서 '교차된 손의 신전'을 발굴하고 안전한 박물관에 보관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을 기술한 몇몇 에피소드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고고학, 인류학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즈미 세이이치가 1967년 8월부터 산악 잡지 <Alp>에 연재한 기록은 1970년 6월에 마무리되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일본 대사관에 걸어서 도착한 기록이 끝이다. 당대의 지리/생태학을 반영한 탐험기이자 문화인류학적 회고록으로 남은 이들 기고문을 김영수 역자가 매끄럽게 번역하고, 소명출판에서 최근 출간한 저작물이 <머나먼 산들>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연재 마무리 5개월 후, 70년 11월 뇌출혈로 급서 했다. 향년 55세. 지병도 없었기에 너무 이른, 애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생이 더 길었다면, 해방 후 조선과 일본의 알피니스트 조직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며 탐험가, 인문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했으리라. 항시 그리워하고 꿈꾸던 히말라야와 아프리카 야생의 고원 등을 누비며 <머나먼 산들> 이후 다음 작품을 펴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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