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그에게 정원은 하나의 소우주이자 도피처였다. '봄비'라 불린 그는 정원에서 안식을 찾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원 가꾸기는 글쓰기, 그림 그리기,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창작 활동이고,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마크 헤이머'는 초년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친부는 '미친개'처럼 그를 가차 없이 헐뜯고 물어뜯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그를 감싸주었지만 평생을 외로움과 병마와 싸워야만 했다. 그는 일찍이 집을 떠나 노숙자, 철도 노동자로 근근이 생활하다가, 미술을 공부하고 글쓰기에 매달렸다. 결국 '정원사'라는 천직을 찾은 그는 그간의 시행착오를 정리하고, 정원을 가꾸면서 머무르고 스치는 자연의 삼라만상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한다. <봄비와 정원사>는 그의 순간순간을 담은 명상록/회고록이자 독자적인 사색과 성찰을 정리한 철학 이야기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 동심으로 돌아갔다. 흙더미를 질주하는 개미 무리와 공중을 비행하는 벌들을 쫓으며 그들의 분주한 일상을 추적한다. 정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제라늄, 라벤더, 라일락, 금강초롱 등 다종다양한 화초들을 보살피면서 자연의 신비함을 깨닫는다. 과거의 유년기를 떠올리며 친부의 폭력에 따른 트라우마에 괴로워하지만, 그에 집착하고 함몰되지는 않는다. 어릴 적 깡통 전화, 백과사전, 들고양이, 민달팽이 등을 다루고 어울리던 추억을 재구성하면서 그 안에 숨은 즐거움, 기쁨, 환희와 같은, 빛나는 감정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마크 헤이머는 소년 시절의 자신을 '그'라 칭하며 거리를 둔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과거의 기억을 헤매다 어쩔 수 없이 고통, 어두움의 늪에 빠지지만, 오래 허우적대지 않고 빠져나와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음영이 짙은 '자아'를 버리고 현재의 투명한 '무아'로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마하고 훈련한 것이었다. 그는 평생의 반려자 '페기'에게 헌신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며, 지난날 친부와 같은 무책임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늙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원을 몸소 가꾸며, 갈수록 쇠잔해지는 심신의 평안을 찾고 회복을 염원한다.
마침내 그는 정원 속에서 삶을 즐기고, 순간순간 피어나는 기쁨, 슬픔, 외로움과 고통 등 온갖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깨달은 듯하다. 독자인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양옥집 정원에 깔린 잔디밭에 누워 뒹굴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코끝을 간지럽히고 찌르던 초록 잎새와 간혹 뛰어오르던 메뚜기며 여치의 날갯짓에 깜짝 놀라던 기억. 단풍나무 아래 묻혀 있던 매미 유충 서넛을 발견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 관찰하다가 다시 파묻어 주었던 그 초여름 오후. 늦여름 매미 소리 요란하던 그 정원과 은행목 가지마다 얽힌, 무당거미가 쳐놓은 방사형 거미줄을 제거하던, 목덜미에 땀이 흐르던 아버지의 뒷모습. 매년 아버지와 함께 양지바른 정원에 연초록 잔디를 심던 그 기억이 선명히 떠올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정원을 가꾸게 되는 행운이 내게 찾아온다면, 마크 헤이머의 <봄비와 정원사>를 서고에서 꺼내 다시 읽어보리라. 분명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노년의 삶을 즐기는 지혜와 정원을 가꾸는 세심한 노하우를 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