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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루이 Feb 27. 2024

저 바다는 삶과 죽음을 모두 품고 있다

로랑스 드빌레르_<모든 삶은 흐른다> 리커버판을 읽고..







나이가 들수록 바다 곁에 머물고 싶다. 보드라운 해변에 앉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잔잔해진다. 가까이 코발트빛 바다에서 물장구치고 헤엄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때로는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곤 한다. 하지만 바다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 바짝 다가가는 건 두려워진다. 헤엄쳐서 가는 건 엄두도 안 나고 요트나 배를 타고 간다 해도 먼 거리 항해는 갈수록 삼가는 마음이 더해진다.


바다는 예측불허, 변화무쌍한 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다. 파도는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곧이어 내리막이 찾아와 짜릿한 스릴과 공평함을 선사한다. 바다는 우리네 삶과 닮았다. 혹자는 산이 인간의 생을 닮았다 하지만, 바다는 삶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 있고 완벽함을 지향한다. 그간 바다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생각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정리한 책이 있다.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이번에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이 새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바다와 인간의 삶의 관계를 돌아보고,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바다에서 마주치는 밀물과 썰물, 섬, 등대, 방파제, 빙하 등을 주제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공감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


어릴 적 어느 잡지를 뒤적이다 시선이 머무른 사진이 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는 흑백 사진. 최근 검색을 통해 바다에 뛰어들려는 남편을 제지하는 아이 엄마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1954년 4월 2일, LA Times의 사진 기자 John Gaunt 가 Hermosa Beach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바닷가의 비극>이라 명명된 이 사진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진이 품은 사연은 당혹스럽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 관련 링크>>

https://rarehistoricalphotos.com/tragedy-by-the-sea-backstory/



부부의 19개월 된 아기는 해변에서 모래 놀이 중이었다. 찰싹이는 파도가 모래를 적시는 가운데, 갑자기 돌풍이 불었는지 아니면 인접한 물살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는지.. 거센 파도가 아이를 덮쳤다. 가까이 서서 지켜보던 부부가 미처 구할 새도 없이 아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닥쳐온 비극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입을 막은 부부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주변에 구조를 요청할 인력도 없었고, 금세 평온해진 바다에게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으니..





멀리서 보기에 바다는 천국과 같이 반짝이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 안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짙어진다. 심해는 칠흑과 같이 어두컴컴하고 아득하다. 미지의 불빛이 어른대는가 싶어 다가가면 비죽한 이빨을 드러낸 괴어가 달려들까 섬뜩하다. 휘몰아치는 조류에 휘말리면 까마득한 심연이 눈을 뜨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바다는 이처럼 삶과 함께 죽음을 품고 있다. 인간의 어떤 불굴의 노력과 의지도 단숨에 꺾을 만한, 실낱같은 운명을 집어삼킬 바다의 블랙홀은 잠시의 고통을 선사하고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 앞으로 곧장 데려간다. 우리는 바다와 삶의 역경에 직면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원숙해질수록 그 파도에 맞서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물침대처럼 잔잔하다가는 포효하며 으르렁대는 변덕스러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정처 없이 흐르다 보면 어딘가에 당도할 것이다. 그곳이 온갖 배가 모여드는 찬란한 미항일 수도 있고, 황량한 무인도일 수도 있다. 표류하다가 근처를 지나는 배의 눈에 띄어 구조될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는 명이 다해 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수장될 수도 있겠지.



그 끝이 어떻든 우리는 지금 눈앞에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패기 넘치게 맞설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숨은 찰 것이고 기력은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삶은 매 순간 다른 파도로 우리를 휘감으며 어딘가로 데려간다. 우리는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마치 우리들 삶을 투영하는 듯한 상념에 젖는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는 바다와 우리 삶에 대한 철학적 혜안을 담고 있다. 



붉은 아치형 창문 너머 푸른 바다가 그려진 책 표지를 덮고 다시금 1954년의 그 바다를 바라본다. 진정한 양서는 책을 읽고 표지를 닫은 후에도 각자의 고유한 사색의 방으로 인도한다지 않는가.


비극적인 사고 이후 그 부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들 그리고 바다를 끝내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디든 육지 끝에는 너른 바다가 존재함을, 사방이 포위되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아이를 집어삼킨 저 바다가 자신들의 삶과 닮았음을 깨닫고, 유유히 흐르는 대로 몸과 마음을 놓아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는지.. 어떻든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냈을 그들의 찢긴 마음을 짚어보고 흉터 자욱을 조심스레 더듬어 본다. 책을 통해 과거의 사진 이미지를 떠올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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