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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루이 Feb 13. 2024

대하 스릴러/경찰 소설의 시작을 알리다

마이 셰발 & 페르 발뢰_<로재나>를 읽고..









스웨덴 예타 운하 보렌스훌트 갑문에서 준설 작업을 하던 중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잔인한 폭행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신원과 단서, 용의자를 찾기 위해 스웨덴 경찰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수사에 별다른 진척이 보이지를 않는다. 스웨덴 최고의 형사 '마르틴 베크'가 수사팀에 가세하고, 그는 콜베리, 멜란데르, 라르손 등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느 날 미국 네브래스카 현지 경찰과 연락이 닿으면서 피해자와 용의자의 신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닥을 모르는 인내심, 논리적이고 냉철한 두뇌를 갖추었지만, 신체적/지능적으로 특출 나지 않은 평범한 경찰인 마르틴 베크는 온갖 난관에 봉착한다. 과연 그는 한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용의자를 체포해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1965년 첫 출간된 노르딕 누아르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열 편으로 완간되었다. 스웨덴의 작가 커플 마이 셰발페르 발뢰가 번갈아 원고를 쓰며 공동 저작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그 시작을 알린 <로재나>는 밀실과 천재 탐정, 수수께끼 풀이에 갇혀 있던 스릴러/미스터리 소설을 스웨덴의 운하와 거리를 헤매는 경찰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그 틀과 형식을 과감히 깨트렸다. 시리즈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마르틴 베크는 셜록 홈스처럼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압도적인 지능을 자랑하거나, 악당들을 박살 내는 괴물 같은 피지컬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험난하고 지지부진한 수사 진도에 낙담하고 괴로워하며,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60년 대 인터넷과 무선 통신이 전무하고 DNA 과학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 발품을 팔아 주변인 심문에 증거 채취를 하고, 각지로 수사 공조 전보를 날리는 그 시대 경찰들.


마르틴 베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연달아 밤을 새 탐문에 장시간 미행을 하다가 감기 몸살에 시달리고, 그의 부인은 언제 집에 돌아오냐고 성화를 부린다. 그는 교살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싶지만, 구시대의 경찰 체제에 갇힌 평범한 인간에게는 힘에 벅찬 희망 사항일 뿐이다.




마이 셰발 & 페르 발뢰는 장기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 실제에 근접한, 리얼한 경찰 소설을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스웨덴의 정치/치안/사회 체제와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태를 세밀히 그렸다. 실제 수사 현장과 흡사하게,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초동 수사는 시작부터 덜컥거리고 힘겹기만 하다. 증거는 수집될 기미가 없고, 목격자와 제보는 나타날 낌새도 없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 일정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멀리 미국 경찰과 인터폴, 내부 동료들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용의자는 희미한 실루엣을 그리며 윤곽을 드러낸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완독하기 위해서는 저자들이 의도한 느린 템포에 맞추어 읽는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하여 인터뷰를 하고, 범행 현장과 피해자를 찍은 필름 사진들을 관찰하여 특이점을 포착하는 경찰들의 주의 깊고 느린 행보에 속도를 맞춰야 한다.



서서히 좁히는 수사망에 걸린 용의자는 예상대로 매력이 넘치고 허점이 보이지 않는, 치밀하고 신중한 자였다. 조심스레 그의 뒤를 쫓고, 미끼를 놓아 함정 수사를 하는 후반의 체포 작전은 형사들의 바닥난 인내심을 시험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막판 올가미를 조여 덫에 걸린 늑대의 발을 낚아채는 것처럼.. 본색을 드러낸 살인자를 연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숨 가쁠 정도로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자연스레 페이지 넘기는 템포도 급 빨라진다. 결국 살인자는 덜미를 잡히고 마르틴 베크는 심문을 통해 그의 약점을 건드려 자백을 받아낸다.

사실적인 경찰/범죄 소설을 표방한 '마르틴 베크'의 첫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두 공동 저자는 이후 대히트한 네 번째 시리즈 <웃는 경관>을 거쳐 마지막 시리즈 <테러리스트>까지.. 총 열 편의 시리즈를 출간하여 경찰 소설의 모범을 세우고, 북유럽 미스터리 스릴러의 원점을 제시했다.




이후 등장한 헨닝 망켈,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등 북유럽의 장르 문학 작가들은 하나같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빚을 지고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박찬욱 감독은 최근작 <헤어질 결심>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책탑으로 쌓은 장면을 삽입하여 각별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장르 문학에 발을 들이고,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소설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마이 셰발 &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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