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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루이 Apr 23. 2024

이토록 흥미진진한 중국 고대 역사서라니..

리숴_<상나라 정벌>을 읽고..








역사학자 리숴의 <상나라 정벌>. 원전 제목은 <전상翦商>, 상나라를 세세히 잘라 해부하다/파헤치다란 의미. 부제는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다.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상나라 곳곳의 유적지, 무덤, 지하 갱에 켜켜이 묻힌 유골 더미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재연한다.  


"1차로 19명을 죽였는데, 머리와 몸뚱이가 온전한 것은 2구뿐이고 정강이나 발목이 잘린 것이 5구, 머리뼈가 있는 것이 10개, 상악골 하나, 오른쪽 넓적다리 하나가 있다. 분별이 가능한 젊은 남자와 여자가 3명이고, 성년 남자가 2명, 아동이 4명, 영아가 2명이다. 4명의 아동은 모두 시신이 불완전한데, 하반신이 없다.. 2명의 영아는 모두 머리뼈만 남아 있다."_22~23p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신이 절단된 상태로, 하늘에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발견된 망자들. 저자는 이들이 중국 교대 훠화 문명을 기반으로 한 상나라의 순장과 인신 공양 제사 풍습을 증언하는 사료라고 서술한다. 상나라는 왕국의 풍요와 평안을 위해 노예와 평민, 귀족을 불문하고 살아 있는 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니발리즘 문화가 존재했다. 망자와 함께 일부 가족과 노예 등이 갱저에 묻히는 순장 풍습과 함께 인신공양은 고대 신관 문화를 대표하는 관례였으니.. 신성하고 어린 자의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꺼내 그 형태로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가 하면, 제물의 꿈틀대는 살점을 육장에 담그거나 무솥에 삶아서는 액을 물리치기 위해 섭식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육신의 일부가 훼손된 자들은 숨이 떨어질 때까지 고통과 비명에 시달리며 다져진 사면의 지하 갱에 버려졌으니, 그 집단 상흔이 현재 중국 은허 지역의 제사갱 등에 남아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평생을 바쳐 탐구한 고고학 유물과 갑골문자,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지하 깊이 파묻힌 상고 역사와 인물들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상나라 주왕에 이르러 무차별적인 인명 살해의 마수는 귀족층에까지 뻗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주지육림, 포락지형의 고사를 기억하는가? 도처에 울음이 퍼지는 가운데, 상나라의 속국이 된 주나라의 문왕에게 비극이 덮친다. 문왕 희창의 장자 백읍고는 포로 신세가 된 아버지의 석방을 탄원하다가 되려 제물이 되어 처형되고 만다. 왕명에 따라 친자의 피가 뚝뚝 흐르는 육장을 삼키는 아버지의 표정이 비탄에 잠긴다. 주나라 문왕은 복수를 다짐하며 토굴에 은신한다. 상나라가 숭상하는 검은 새를 저주하며 건괘를 조합하여 두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기묘한 은유가 넘치는 글을 엮었으니 저자는 이를 <역경易經>이라 주장한다. 역경은 주 문왕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친족의 복수와 함께 상나라의 몰락을 기원하고, 주나라의 길복 역전을 염원하는 비밀스러운 점괘서였다는 것이다.





결국 주나라 무왕에 이르러 결성된 동맹군은 목야 전투를 통해 상나라의 주력 방어군을 섬멸한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물 건너는 이의 정강이를 도륙하던 폭군 주왕은 분신하여 자결했다. 친형 백읍고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무왕은 복수를 위해 주왕을 재차 참수하고, 상 왕족과 측근들을 모두 인신 공양 풍습대로 천천히 살해하며 카니발의 밤을 즐겼다. 친족의 인신공양 참극과 통렬한 복수, 후대의 금의환향에 이르는 고대 서사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이후 이어지는 주공의 인본 정치를 숭상하는 섭정과 상나라 역사 지우기, 상나라의 후예였던 공자의 역경에 대한 촌평과 어두운 선대 역사에 대한 하소연, 육경 편집 에피소드까지.. 저자 리숴의 기존 고대 역사관을 비틀고 깨부수는 혜안과 논리적이면서 풍부한 서사 능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 책으로 인해 중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학계 인식이 바뀌었고, 석기시대부터 시작된 하/상/주나라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세간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니.. 기회가 되면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1000 페이지 육박하는 두터운 역사서지만, 관련된 유적 사진과 스케치, 지하갱 도면이 상세하여 큰 막힘없이 완독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두 나라의 일족 살해 & 복수 활극 서사가 몰입감이 상당하여 마치 대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하다. 중국 출간 1년 만에 40만 부를 돌파하면서 경직된 중국 상고사 학계에 날 선 도끼를 내리친 <상나라 정벌>이 국내에 상륙했다. 이제 당신이 육중한 청동 도끼를 받아 들어 날과 자루에 새긴 갑골문을 더듬어 훑을 차례다. 석화된 검은 새가 날갯짓을 하고, 지하에 묻힌 억울한 망자들이 깨어나 손짓을 한다. 우리는 그들의 한 맺힌 사연과 참회록을 밤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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