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3호는 갈수록 혼란한 세계 체제하에서 한반도가 어떻게 생존하고 활로를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올해 예정된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집권하리라는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천조국 달러와 IT, 막강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제국. 미국은 분열하고 있으며 카오스의 중심으로 돌입하는 중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국, 러시아와 미국의 최전방 전선에 위치한 한반도는 과연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혼종화 되는 세계 체제에서 생존하고 진화하는 성공 서사를 써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한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창작과 비평 측면에서 풍성한 콘텐츠를 담고 있다.
산문은 공선옥 작가의 <담양산보>, 김금희 작가가 연재하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 최종 편이 눈에 들어온다.
시편에서는 고명재 시인, 김정환 시인, 김이듬 시인 등 신구가 조화로운,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형태의 시가 돋보인다.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문학 비평도 뒤질 수 없다. 김해자 시집 <니들의 시간>을 조명하는, 유병록 시인의 정갈하고친근한 글이 일품이다.
시인의 마음에 담긴 무수한 울음이 조각조각 이어져 천의무봉의 웃음에 이른다는, 세심유쾌한 글을 놓칠 수 없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이하여 미지의 땅 유라시아에서 조우한 유홍준 작가를 추억하는 강인욱 교수의 글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사기를 이어가도록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창작과 비평>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릴 적 낡은 마호가니 책장 위 칸에 나란히 꽂힌, 누렇게 바랜 7~80년대 문예 잡지들. 아버지는 종종 마음이 심란할 때면 까치발로 서서는, 일렬로 늘어선 장서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무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습기를 머금어 쭈글한 표지를 쓰다듬는 것만으로, 정연한 목차를 훑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위안과 힘을 주는 그 시대 수많은 창작물과 평론들. 그 시절 <창작과 비평>은 무력통치와 외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줄기차게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가 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운동의 고갱이와 밑알이 되었다.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은 그 시대 <창작과 비평>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고, 경직된 사회를 뒤흔드는 울림이 있다. 마흔이 넘은 나 또한 여러 권의 창작과 비평 지난 호를 서가 가장 높은 곳에 꽂아두고, 가끔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
현재 한반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짚어 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혜안이 눈부시다. 신인 작가를 발굴하여 지면에 등장시키는 문학 등용문 역할도 충실하다. 언젠가 내 글도 어느 최근호의 목차와 페이지 어딘가에 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까지 불쑥 움튼다.
90년대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서가를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두 발 모아 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누릿한 책등을 매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창작과 비평>은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굴곡진 시대에 지치고 좌절한 모든 이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담벼락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