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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과경계 May 23. 2024

여성민요의 길

들어가며

제가 여성민요의 통시적 흐름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탐색하던 시기입니다. 지도교수님은 그 주제로 박사학위를 쓰는 일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학문적 성숙을 이룬 그 끝자리에서 쓸 수 있는 테마라고 하셨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주제를 다시 모학회에 투고했습니다. 새내기 같은 연구자의 거시적 시각이나 안목을 모두 불안해했습니다. 물론 제 연구는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그 열정과 호기심이 옅어지고 사라졌던 어느 날 문득,  그 부족함은 여전하지만 준비한 만큼 길을 내놓고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접어둔다면 영영 기회를 잃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여성민요가 걸어온 길을 제 방식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말로 전승되어 특정 시기에 기록되고 수집되어 남아있는 화석이 된 여성민요를 제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록된 문학과 달리 남겨진 편린 혹은 흔적을 근거로 추정하는 일이 불가피한 작업이지만, 여성의 일상 생활과 생애를 연계하여 노랫말을 들여다보면서 그 길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저는 인류학자나 민속학자는 아닙니다. 노랫말을 통해 유추하고 해석하고 상상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이미 사라진 무수한 여성의 말들을, 생각들을, 감정들을 꺼내 놓고 싶을 뿐입니다.


민요는 본래 일정한 기능과 함께 불려졌습니다. 기능 즉 노동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자라고 또 위축되거나 소멸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이 사라진 민요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처럼 그렇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라진 민요를 재구성하여 연행하지만 그건 진정한 민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민요가 민요다우려면 사람들에게 불리고 전승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에도 민요가 과연 지속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민요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정서적 호소, 감정의 토로는 여전히 유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못다 풀어낸 감정이나 생각을 토로하는 수단으로 노래를 합니다. 최근 유행하는 트로트 열풍은 이런 맥락에서 민요를 대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과 같은 기능은 사라졌지만 노래하기의 열망하는 문화적 유전자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여성민요는 태어나고 성장했고, 쇠퇴하면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여성민요의 탄생과 성장, 여성민요의 지속과 다양화, 여성민요의 쇠퇴와 혼종화 그리고 대중예술로의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적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음악가들 가운데는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과 결합한 한국적 음악을 창작하고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 기층에는 민요와 무가가 자리합니다. 민요와 무가를 지키며 전승했던 이들의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오늘날 여성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거대한 공동체로 소비와 유통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한국적인 문화적 유전자가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여성민요의 노랫말은 여성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일상에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이 나타납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노래하면서 억압과 폭력이 일상을 지배했을 때도 굳건하게 자신을 지켜냈던 흔적이 살아있습니다. 살기 위해 순응하고 타협했으며, 절망하며 저항하기도 했던 그런 흔적말입니다. 노랫말에 깃든 순응과 타협, 저항과 절망의 말들을 퍼즐을 맞추듯 채워나가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여성민요의 길을 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민요의 길을 탐구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노래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이기도 합니다. 여성민요가 함의하는 문화적 기능은 현재에도 작동하며 미래에도 유효할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로 진행하면서 쇠퇴,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전통적인 개념의 여성민요에 대한 통사적 고찰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K-문화의 반쪽을 탐색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문화적 지평을 열어가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전공자나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지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무지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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