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을 하고,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샤워를 시키고,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주고 다 같이 누워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스르륵 한 명씩 잠에 들면 엄마로서의 나의 하루가 오늘도 무사히 끝났음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저녁엔 시간이 오전 오후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고 나면 나도 기진맥진해진다. 이대로 아이들 옆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온다.
아이들이 잠든 밤, 비로소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고요한 밤, 나 홀로 글씨를 쓰는 시간. 이 시간이 참 좋다.
베란다 창 사이로 달빛이 비치고 순간 눈이 마주친 보름달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았다.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시작한 캘리그라피. 평소 글씨를 잘 쓰기는 커녕, 오히려 악필에 가깝던 내가 왜 글씨 쓰기에 꽂혔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둘째가 두 돌이 되던 그 달에 우연히 캘리그라피 전문 기관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평일 저녁 7시 30분 강남역. 애 엄마인 나와 그 시간도 그 장소도 참으로 어울리지 않다. 남편의 "한번 해봐 그 시간에 내가 아이들 재우면 돼"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무작정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시작은 했으나 젊고 유능한 동기들에 비해 한참이 떨어지는 실력.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연습뿐이었다.커서 뭐가 될지(?) 아직 모르겠는 나는 헤르만 헤세의 <방랑의 길에서> 중 한 구절을 쓰며 오늘도 무작정 글씨를 쓴다.